이 작품은 박완서(1931-2011)의 초기 작품집 ‘꿈을 찍는 사진사’에 실린 4개의 단편 중 하나이다. 등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작가의 초기 문학세계가 잘 나타나 있는 이 작품으로 중학교에 첫 부임한 교사가 겪는 시행착오와 경험담을 통해 이 사회의 부조리와 빈부의 격차 등을 고민하지만 결국은 비극으로 끝나는 주인공의 허위의식을 다룬 작품이다.
“올해 처음 부임해 초보 담임선생님이 된 영길이 근무하는 학교는 부촌과 빈촌의 협곡 사이에 위치해 있다. 영길의 약혼녀 옥순은 동화 같은 상상을 많이 하는 천진하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스타일로 선생님인 영길에게 ‘꿈을 찍는 사진사’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러나 영길은 고민이 많다. 학부모의 촌지와 가난해서 학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영길, 결국 영길은 촌지를 받아 가난한 집 아이들의 학비를 내주지만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 아이들도 영길의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는다.
신학기가 되어서 그런지 인사 오는 학부모들이 거의 매일 한 명씩은 있었다. 아버지는 어쩌다가 있고 대개 어머니들이었다. 어머니들은 인사 이상의 긴 이야기를 하려 들었고, 이야기 중간이나 끝나갈 무렵에, 아부와 경멸이 반반씩 섞인 야릇한 미소와 함께 영락없이 촌지라는 걸 밀어 넣었다. 흰 봉투를 핸드백에서 꺼내서 내 주머니나 서랍, 혹은 책갈피에 밀어 넣는 동작은 어찌나 민첩하고 전혀 소리가 없는지, 눈 깜빡하면서 본 백주의 환각 같았다.”
-본문 중에서-
영길은 자신이 촌지를 받아서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다는 것에 대해 남들이 알아주길 바랬다. 선행은 남들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관계없이 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영길은 점점 싫증을 느끼며 선의는 없어지고 고행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그 일에 그렇게 쉽게 싫증이 난 이유는 그 일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데도 있었다. 선행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만 비로소 선행답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왼손은 몰라줘도 알 만한 사람은 좀 알아줘야 신명이 날 게 아닌가. 너무 안 알려지고 너무 감사를 못 받으니 쉽게 진력이 날밖에.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자는 이미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란 생각이 쓸개즙처럼 씁쓸하게 치밀었다.'
영길이 하숙하고 있는 집의 석민 엄마는 영길을 유혹한다. 약혼녀 옥순은 성에 대해서만큼은 어찌나 고지식한지 영길에게 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옥순의 단단하고 튼튼하기까지 한 성의식에 지친 영길은 결국 석민 엄마의 유혹에 넘어가고 충격받은 약혼자 옥순은 뛰쳐나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산업사회로 진입한 1970년대는 50년대, 60년대를 지나면서 굳어져 온 반공과 조국 근대화 정신이 두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와 산업화 시대의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중적 행태를 말하고 있다. 영길의 인정 욕구와 성적 욕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 약혼자가 있으면서도 남자로서의 본능적 욕구를 풀지 못하는 아쉬움, 결국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처럼 영길은 결국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파멸당하고 만다.
작품을 읽으면서 남을 돕는다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려 한다. 좋은 일, 착한 일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거나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숭고한 일이기에 작은 것이라도 남을 돕는다는 것에 반대급부를 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혹시 보여주기식의 봉사로 생색내며 자기만족의 뿌듯함에 도취해 있지 않은지도 점검해야 한다. 봉사는 국민의 4대 의무처럼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민병식]
시인,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현)대한시문학협회 경기지회장
현)신정문학회 수필 등단 심사위원
2019 강건문화뉴스 올해의 작가상
2020 코스미안상 인문학칼럼 우수상
2021 남명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상
2022 신정문학상 수필 부문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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