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를 하며 보낸 인생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생보다는 훨씬 더 존경받을 만하며 또한 더 유용한 삶이다.
- 조지 버나드 쇼
오래 전 언론매체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분을 술자리에서 뵌 적이 있다. 그 분이 내미는 술잔을 받다가 나도 모르게 떨어뜨렸다. 나도 모르게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눈과 손이 어긋나 술잔 하나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다.
그때 모골이 송연했다. ‘아,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이었구나!’ 그 뒤 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분이 내가 근무하던 시민단체의 대표로 오면서 나는 그 분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뒤 유명한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만나 보았다. ‘인간이 얼마만큼 위대할 수 있는 거야?’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같은 인간인데, 어쩌면 저렇게 클 수가 있는가?’
나도 모르게 그분들을 우러러보게 되고 복종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복종이라는 단어를 명확히 이해했다. 그렇다. 진짜 존경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복종하게 되어있다. 그러면 존경을 받는 사람은 추종자를 어떻게 대할까?
‘너 잘 만났다!’하고 이용하려들까? 사이비 유명인들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진짜 잘난 사람은 따뜻하게 대해준다. 왜? 그게 강자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어머니가 자식들보다 강자지만 자식을 세심하게 보살펴주지 않는가?
진짜 강자는 어머니와 같았다. 내게 시를 가르쳐주셨던 강자 ㄱ 시인은 같이 묵었던 여인숙에서 이불 속으로 들어간 내 양말을 찾아주셨다.
그 당시 그 분이 대학에 강연을 가면 수천 명의 학생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맞이했었다. 강자가 약자를 돌보고 약자가 강자를 따르는 것은 생명체들의 본능일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서로 관계를 맺으며 눈부신 문명을 이루어왔다.
그런데 복종하지 않는 존경이 있다. 오래 전에 ㅅ 도서관에 강의를 갔다가 그런 체험을 했다. 한 수강생이 나를 존경한다고 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강의 시간에 내게 손을 들고는 소리쳤다. “선생님이 아무리 잘났어도 예수님만 못해요!” ‘응? 예수님이라니? 나를 누구와 비교하는 거야?’ 나는 그때 알았다. 존경의 무서움을.
복종이 따르지 않는 존경은 환상이다. 그녀는 내게 자신의 ‘이상상(理想像)’을 투사했던 것이다. 자신이 각고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할 이상상을 내게 뒤집어씌우고서, 자신은 그대로 편안하게 살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내게서 그 이상상이 벗겨지는 순간, 그녀는 내게 맹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존경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복종하려 해야 한다. 따를만한 게 뭔가? 자신이 그 사람처럼 되려고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
‘태산북두’라는 말이 있다. 태산과 북두칠성을 우러러 보는 것처럼 남에게 존경을 받는 뛰어난 존재를 말한다. 우리는 온갖 위인전, 영웅전을 통해 그런 인물들을 접한다. 대개는 존경하고 끝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이상상을 향해 매진하지 않는다면, 태산북두의 인물들은 우리를 피폐하게 만든다.
땅에게 묻는다 : 땅은 땅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존경하지.
물에게 묻는다 : 물은 물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채워주지.
풀에게 묻는다 : 풀은 풀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짜여들며
지평선을 만들지.
사람에게 묻는다 :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 휴틴, <사람에게 묻는다> 부분
인간에게는 ‘자아’가 있어, 자신을 늘 골똘히 생각하게 되어 있다. 땅, 물, 풀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갈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실수를 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실수에 대해 우리는 서로 너그러워야 한다.
실수가 두려워 자신이 져야 할 짐을 남에게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 남을 존경하며 살지 말아야 한다.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