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8살 11월부터 39살 5월까지 남해군 설천면 금음마을에서 살았다. 정확하게 1992년 11월부터 2002년 5월까지 만10년 6개월이다. 사람들 머리를 매만지면서 아침 6시면 일어나서 저녁 6시까지 일했다. 어떤 날은 저녁 12시까지 온종일 서서 일해야 했다.
지치고 힘들어서 혼자 운 날도 많았다. 그런 날들 속에서도 위안이 된 날이 있다면 한 달에 두 번 정기휴일 날이다. 정기휴일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친 일상에 에너지를 넣기 위해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유적지를 찾았다. 그곳의 자연과 역사 속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고 그것이 살아가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에너지를 얻어서 보름을 참고 또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꼬박 10년을 근검절약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미래를 위해 경제적 기반을 탄탄하게 잡았던 마을이 금음마을이다. 내게 10년 만에 삶의 기반을 탄탄하게 잡게 했던 금음마을은 예전에 금을 캐던 광산이 있었고 그 광산에서 쇳소리가 났다 하여 쇠 금(金)에 소리 음(音)을 쓰는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부부가 둘이서만 10년 넘게 금을 캤다고 한다. 금을 캐던 마을에서 금을 캐듯이 열심히 일해서 경제적인 자유를 얻었던 사람으로서 지금도 금음마을을 지날 때면 마을 이름과 내 삶을 연관 지어 보고는 한다. 또 금을 캐는 광산이 쇳소리가 난다 하여 금음이라고 한 이 마을에 설천면 농협도 자리하고 있어 설천면의 모든 돈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이다. 이래저래 부(富)와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을인 듯하다.
용강마을의 용은 용 용(龍)에 산등성이 강(岡)이다. 뱀이 산등성이를 넘은 오는 형국의 마을이라 하여 예전에는 뱀 사(蛇) 고개 재(岾)를 써 ‘사재’라고 했지만 행정구역 개편하면서 용강이라고 하였다 한다.
금음마을에서 남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살던 그때 ‘사재’라고 했던 용강마을 사람들은 내게 참 따뜻했었다. 내 태몽은 황금구렁이가 배속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용강(사재) 사람들은 변함없이 내게 머리를 맡겼다.
돌 지난 큰 딸아이를 데리고 시작하면서 작은 딸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울면 업고 서서 일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용강에 사시는 분이 “민희 엄마 고생한다. 언젠가는 떵떵거리고 살 때가 있을기다.”며 위로해 주었다.
먹고 사는 일에 바빴던 그런 날들 속에서 금음이란 이름값을 하는 마을에서 돈을 벌었고 용감마을 사람들이 주었던 따뜻함 참 고마웠다. 일을 그만두고 해설사를 하는 내가 간혹 신문에 기고를 하면 글을 읽고 용강마을 분 중에 “민희 엄마, 오늘 신문에 난 글 잘 읽었다. 내는 옛날부터 민희 엄마가 보통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당신 자식이나 된 듯이 전화하고 좋아해 주셨다.
젊은 날에 금음마을에서는 돈도 벌고 황금구렁이 태몽을 꾸어서 그랬는지 ‘사재(용강)’분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얼마 전에도 약국에 갔다가 ’용강(사재)’ 분을 뵈었는데 “민희야, 잘 살재? 참 반갑다야, 궁금하더마는 이렇게 보네 잘살아라.”하시며 말없이 두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알아주는 곳에서 빛이 난다. 일을 그만둔 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연히 만나면 애틋하다. 부모, 형제보다 알아주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 시절 금음동네에서 살았고 ‘용강(사재)‘분들이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