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는 거칠부(居柒夫)라는 신라인의 이름이 실려있다. 거칠부(居柒夫)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줄로 안다. 그런데 황종(荒宗)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거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좀 해 본 사람 아니면 황종(荒宗)이란 이름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거칠부(居柒夫)는 황종(荒宗)이라고도 했다.”고 설명이 되어 있지만 『삼국사기』를 제대로 꼼꼼하게 읽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인데,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황종(荒宗)’이란 이름을 처음 접하는 분들이 계실 것으로 생각된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인 고려나 신라 그리고 그 이전 삼국시대에는 입으로 말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글자가 없어서 그 말하는 것을 글로 적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웃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글자(한자)의 음이나 뜻을 빌려서 우리말을 표기하였는데 그것을 ‘차자표기(借字表記)’라 한다. 차자표기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표기자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당시 사람들이 great man이란 의미에서 [거칠부/kutir-bur]라 일컬었던 이름을 “居柒夫”라고 쓰거나 “久遲布禮”라고 쓰는 것은 한자의 음만 빌려쓴 음차표기요, “荒宗”이라 쓰는 것은 한자의 뜻을 빌려쓴 훈차표기이다.
훈차표기 중에서도 사음훈차(似音訓借)이다. 이 사음훈차란 용어는 현재의 학계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필자가 만들어낸 것인데, 여기서는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다. 아무튼 [kutir-bur] 정도로 일컬었던 인명을 “居柒夫”라고 음차하여 적기도 하고 “荒宗”이라고 ‘사음후차+진의훈차’하여 적기도 하였다는 게 핵심이다. 그러니까 ‘居柒夫’와 ‘荒宗’은 동일한 이름 [kutir-bur]을 차자방식만 달리하여 적은 것이고 동일한 인물의 이름이라는 것만 알아두시면 된다.
이제 김유신(金庾信)의 이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는 아버지인 김서현이 ‘庾信’이란 이름을 짓게 된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고 있다.
“내가 경진(庚辰)일 밤에 좋은 꿈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당연히 이 ‘경진(庚辰)’으로 이름을 지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예법에는 날짜로 이름을 짓지 않는다오. 그러하나 이제 생각해보니 경(庚)은 유(庾)와 글자가 서로 비슷하고, 진(辰)은 신(信)과 발음이 서로 비슷하며, 더구나 옛날의 현인 중에도 유신(庾信)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어찌 이를 이름으로 삼지 않겠소?”
물론 이 내용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줄 안다.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유신(yu-shin)아!"라고 부른 이름도 아니었을 것이다. 도대체 김유신(金庾信)이란 이름은 어떠한 이름일까? 필자는 김유신의 이름이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는 [ᄀᆞᆯᄂᆞᆱ] 정도로 부르는 이름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ᄀᆞᆯᄂᆞᆱ]은 현대한국어로 하면 ‘클놈(큰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큰 인물’이란 뜻을 가진 [ᄀᆞᆯᄂᆞᆱ/kor-norm]을 한자 庾와 信으로 차자하여 표기한 것이다. 한자 庾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골]이다. ‘골방’이라고 할 때의 그 [골]이다. [골]은 창고를 뜻하는 말인데 일본어의 ‘쿠라(くら)’와 같다. ‘倉, 庫, 庾, 廩’을 모두 일본어로 ‘쿠라(くら)’라고 한다. 한국어 [골]과 일본어 [쿠라(くら)]는 같은 어원에서 분화된 게 분명해 보인다.
일본인의 인명에서 信은 대개 “노부(のぶ)”라 읽는다. 信子를 “노부코(のぶこ)”라 하고, 織田信長을 “오다 노부나가(おだ のぶなが)”라 한다. 만약 庾信이라는 이름을 일본어에서 읽는다면 “쿠라노부”라 읽을 것이다. [ᄀᆞᆯᄂᆞᆱ/ᄀᆞᆯᄂᆞᆲ]이라 하는 이름을 ‘庾信’이라고 차자하여 쓴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김유신의 실제 이름이 [ᄀᆞᆯᄂᆞᆱ]이었을 거라고 유추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이러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기이 제1 김유신편에는 김유신이 전생에 고구려의 점쟁이였는데 상자 속에 든 쥐가 몇 마리냐는 질문에 8마리라고 대답함으로써 상자 속의 쥐가 7마리의 새끼를 배고 있다는 사실까지 정확히 알아맞혔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되자 자신을 죽인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신라사람인 김서현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화가 실려있다.
그 고구려 점쟁이의 이름이 楸南(추남)이었다고 한다. 한자 楸는 ‘가래 추’자이다. 호두 비슷하게 생긴 가래나무를 말한다. 그러니까 ‘楸南’은 [가래남]이라는 말을 ‘훈차+음차’한 표기인 것이다. 楸南 [가래남]은 庾信 [ᄀᆞᆯᄂᆞᆱ/ᄀᆞᆯᄂᆞᆲ]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점쟁이 이야기는 김유신의 실제 이름이 [ᄀᆞᆯᄂᆞᆱ]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까지 차자표기를 바탕으로 하여 김유신(金庾信)의 이름에 대해 풀이해 보았는데, 김유신의 계보에 대하여 몇 마디만 더 덧붙이기로 한다. 김유신은 구형왕의 셋째아들인 김무력(金武力)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김무력이 김서현을 낳았고, 김서현이 만명(萬明)과 야합하여 김유신을 낳았다고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김유신의 조부를 김무력(金武力)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먼저 이들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김유신(金庾信)은 경주 사람이다. 그의 12대 할아버지 수로(首露)는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峯)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아홉 촌을 살펴보고, 드디어 그 땅에 가서 나라를 열고 국호를 가야(加耶)라 했다가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바꾸었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9대 자손인 구해(仇亥)[혹은 구차휴(仇次休)라 한다.]에 이르렀는데, 유신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소호(少昊) 김천씨(金天氏)의 후예라고 여겼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이며, 소호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남가야 시조 수로도 신라와 성이 같았던 것이다.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아버지 서현(舒玄)은 벼슬이 소판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그런데 유신의 비문을 살펴보면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이다.”라고 하였으니, ‘서현(舒玄)’이 고친 이름인지 아니면 ‘소연(逍衍)’이 그의 자(字)인지 알 수 없다. 확실치 않아서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해둔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호력(虎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각간(舒玄角干) 김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는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로 어렸을 때 이름이 아햬(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로 어렸을 때 이름이 아지(阿只)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김유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김유신의 계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법흥왕 19년(서기 532년) 가야국 구형왕이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에 들어가 항복하였는데, 김유신은 구형왕의 증손자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구형왕의 셋째아들인 무력(무득)의 손자가 김유신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이렇게 기술하고 있어 이것이 잘못된 기록이라고 의심해 볼 여지조차 없어 보인다. 따라서 지금까지 학자들은 위의 계보를 믿어 의심치 않았고, 필자 역시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고대의 인명과 국명 지명을 연구하던 중 필자는 이 계보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 모두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유신은 김무력(金武力)의 손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위 계보에는 보이지 않는 솔지공(率支公)의 손자이고,. 노종(세종)의 손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형왕의 첫째왕자인 노종(세종)의 아들이 솔지공(率支公)이고 그 솔지공의 손자가 김유신이라는 얘기다. 위 계보에는 빠져 있으나 서기 532년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할 때 세 왕자만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장손 솔지공(率支公)도 함께 데리고 갔다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관련 기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 삼국유사 가락국기 구형왕
김씨. 정광(正光) 2년에 즉위. 치세는 42년.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년) 9월에 신라 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할 수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支尒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尒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으니 첫째는 세종각간(世宗角干),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 셋째는 무득각간(무득각간)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년)에 신라에 항복했다.”고 하였다.
논평해 말한다. 『삼국사』를 살펴보건대 구형왕은 양(梁)의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년에 땅을 바쳐 신긴라에 항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의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년)으로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년(서기 532년)까지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일 이기록으로 살펴본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 2년 임오(壬午; 562)년에 해당된다. 그러면 30년을 더하게 되어 도합 520년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을 모두 기록해 둔다.
(2) 삼국유사 가락국기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용삭(龍朔) 원년 신유년(辛酉年; 661년) 3월에 왕이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의 9대손인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잡간(庶云匝干)의 딸 문명황후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리라.”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 가락국기
위에 인용한 기록은 둘 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려있는 내용인데 구형왕의 손자 이름이 다르게 되어 있다. 하나는 “卒支公(졸지공)”으로 되어 있고 하나는 “率友公(솔우공)”으로 되어 있다. 본래 [솔지/sor-zhi]라 일컬는 이름을 그렇게 적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한자 ‘卒’을 일본어에서 읽으면 “소츠(そつ)”라 한다.『일본서기』에 나오는 ‘卒麻國(졸마국)’은 “소츠마”라 읽는다. 차자표기 관점에서 볼 때, ‘卒麻(졸마)’와 ‘薩摩(살마)’, ‘肥前(비전)’, ‘鹿兒(녹아)’가 모두 동일한 [사츠마/sartsma]를 표기한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는 졸저 『여기가 임나다』라는 책 제3장 1절 ‘히젠(火前)과 가고시마(鹿兒島)’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러니까 한국어에서는 ‘卒支公(졸지공)’과 ‘솔지공(率支公)’의 한자음이 다르지만 일본어에서는 둘 다 “소치코”로 읽힌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卒支公’은 올바른 표기이지만 ‘率友公’은 잘못된 표기이고 ‘率支公’이라 해야 올바르다고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率友’는 기록자가 베껴 쓸 때 글자 모양을 헷갈려서 잘못 보고 ‘率支’를 ‘率友’라 쓴 것이며 ‘率支’가 올바른 표기라는 얘기다. 필자가 사용하는 용어로 하자면, 友는 支의 미영자(迷影字)인 것이다.
이 ‘率支公(솔지공)’이란 이름은 『일본서기』에 자주 등장하는 갈성습진언(葛城習津彦)의 ‘습진언(習津彦; 소츠히코)’과 똑같다.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 신대기에는 ‘天津彦(천진언)’과 ‘天稚彦(천치언)’이란 이름도 실려있는데, 이들 역시 [소츠히코]를 차자한 표기로 동일한 인물로 추측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 수인천황기에는 ‘天日槍(천일창)’이라는 신라왕자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는데, ‘天日槍’ 역시 한국어로 [솔씨솔곧]이라는 이름을 차자한 표기인 바, 이들은 모두 동일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532년 신라에 항복한 가야국 구형왕의 손자인 ‘卒支公(졸지공)’과 『일본서기』에 실려있는 ‘習津彦(습진언)’, ‘天津彦(천진언)’, ‘天稚彦(천치언)’, ‘天日槍(천일창)’이 모두 동일한 이름을 적은 것이며,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그외에도 『일본서기』 신공기 62년조에 보이는 ‘沙至比跪(사지비궤)’와 『일본서기』 웅략기 23년조에 보이는 ‘狹手彦(협수언)’도 동일한 이름을 표기한 것이며,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를 읽을 때에는 이들 이름이 같은 이름이고 이들이 동일인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읽어야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일본서기』의 연도와 기술내용을 하나씩 바로잡아갈 수 있다. 멋모르고 역사연구에 매진하겠다는 자세로 덤비다가는 『일본서기』의 미로에 빠져들게 되고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임나일본부설을 격파하겠다는 의욕만 앞세우다가 임나일본부설을 공고하게 굳혀 줌과 동시에 역사를 왜곡하는 데 앞장서는 결과만 초래하게 될 수 있다. 여태까지 한국의 고대사 연구자 대부분이 그러한 전철을 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신라의 인명 중에 황종이란 이가 있다. 김유신(김유신)차자표기란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입으로 주고받던 말을 글로 적고자 해도 적을 문자가 없어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글자(한자)의 음이나 뜻을 빌려서 적었는데, 그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두(吏讀) 향찰(鄕札) 구결(口訣)이 모두 차자표기이고, 고유명사표기 역시 차자표기이다. 이두 향찰 구결에 대해서는 꽤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편이지만 고유명사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고대의 인명 국명 지명 등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을 못하고 있다.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차자표기의 분류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주동 박사 이래로 기존의 연구자들이 해온 분류방법에 따르다 보면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장벽이 있다. 바로 ‘연천(淵遷)-쇠벼라‘이다. 차자표기 연구자들 대부분이 이 ‘연천(淵遷)-쇠벼라’ 앞에서 좌절했을 것이다. 필자 역시 ‘淵遷-쇠벼라’에 맞닥뜨렸을 때 심한 절망감을 맛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등학교 때 배운 음차(音借)와 훈차(訓借)만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 절망감은 좀 덜했던 게 아닐까 싶다. 양주동 박사의 음차 훈차를 후대의 학자들이 세분화하면서 음독자(音讀字) 훈독자(訓讀字) 음가자(音假字) 훈가자(訓假字) 같은 용어가 생겨났는데, 그 과정에서 차자표기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자체가 혼란스러워져 버렸고, 그 바람에 차자표기 연구자들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암흑 속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차자표기는 해독자의 입장에서 볼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표기자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내가 2천년 전의 표기자라 생각하고 그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차자표기를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가령 ‘荒宗’이라고 표기된 이름이 있다고 하자. 차자표기 연구자는 이 ‘荒宗’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옛날 신라시대의 표기자는 [거칠부/kutir-bur] 라 하는 이름을 荒宗이라는 한자로 차자하여 적은 것이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荒宗’을 굳이 “거칠부”라고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荒宗은 그냥 “황종”이라 읽고, 기실 엣날의 표기자는 [거칠부]라는 이름을 그런 식으로 차자하여 적었을 거라고 추찰하면 되는 것이다.
고등학생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것이 吉同郡과 永同郡이라 한다. 吉同郡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永同郡에 대한 설명에는 도무지 수긍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 본래 [길동/kir-dong]이라 일컫는 지명을 永同이라고 차자하여 적은 것이니 永同은 “길동”이라고 읽어 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후대인들이 그러한 사실을 잘 모르다 보니 그냥 한자음 그대로 “영동”이라 읽고 있다. 그렇다면 영동의 永은 도대체 어떤 차자방법을 사용한 글자인가? 한자음을 그대로 읽으니 음독자(音讀字)인가? 永이 ‘길 영’자이니 훈독자인가? 아니면 실제 뜻과는 관계없으니 훈가자(訓假字)인가?
고등학생들을 환장하게 만드는 이 차자표기 분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조차도 갑갑하게 만드는 법으로 치자면 악법에 가까운 분류체계라고 지적하고 싶다. 고대한국어의 차자표기는 현대일본어에서 사용하는 음독 훈독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대일본어의 음독 훈독 개념은 표기자의 관점이 아닌 해독자의 관점에서 분류하는 것이다. 반면 고대 한국어의 차자표기는 해독자의 관점이 아닌 표기자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 표기자는 사람들이 [kutir-bur]라 읽어주기를 바라고 ‘荒宗’이라고 차자한 것이므로 그렇게 읽어줘야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황종”이라고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荒宗을 “황종”이라 읽는 것은 올바르게 읽는 것이 아니고 잘못 읽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잘못 알고 잘못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본래 [거칠부]란 이름을 그렇게 적은 것이므로 “황종”이라 읽는 것은 잘못 읽는 것이고 “거칠부”라 읽어야 옳다고 해야 한다. 설령 모든 사람이 그렇게 잘못 읽고 있다 하더라도 잘못 읽는 것은 잘못 읽는 것이고 올바르게 읽는 것은 올바르게 읽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지구는 평평하고 네모난 모양이라고 알고 있고 그렇게 믿었다고 해서 지구가 네모나고 평평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모든 인류가 그렇게 믿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해도 지구는 네모난 모양이 아니라 둥근 공모양이었다.
후대의 해독자들이 잘 모르고 永同郡을 “영동군”이라 읽는다고 해도 본래의 永同郡은 [kir-dong]이라는 지명을 적은 것이므로 [길/kir]이라 하는 말을 永으로 차자한 표기라 해야 할 것이다. 후대인들이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음독자라 할 것이나 훈가자라 할 것이냐 분류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임나(任那)’라는 국명은 옛날 사람들이 ‘너른 곳 중에서 으뜸가는 곳’이란 뜻에서 [ᄆᆞᆮᄂᆞᆯ/mot-nor]이라 일컬었던 말을 ‘사음훈차+음차’한 표기라고 설명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맡라] 정도로 일컬었던 국명을 한자로 ‘任那’라 차자하여 적었다는 말이다. 한자 那는 [ᄂᆞ]를 음차한 표기이고 한자 任(맡을 임)은 [맏]과 비슷한 음을 가진 말 [맡]에 해당하는 한자라는 점에 착안하여 표기자가 [맡]이라는 우리말을 ‘任’이란 한자로 사음훈차(似音訓借)하여 적은 것이라는 게 글의 핵심이다. 다시말해, ‘任那’라는 표기는 당시 사람들이 [맡나]라 일컬었던 국명을 한자로 차자하여 적은 것이라는 얘기다.
차자방식을 달리하거나 다른 한자를 빌려서 적는다면, ‘말로(末盧)’나 ‘만로(萬盧)’라 적을 수도 있고 ‘마로(馬老)’나 ‘희양(晞陽)’이라 적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말해, ‘임나국(任那國)’은 현 큐슈 북단의 마츠우라시(松浦市)에 있었던 고대국가 ‘말로국(末盧國)’, 전라남도 광양시에 있었던 고대국가 ‘만로국(萬盧國)’과도 동일한 국명이라 할 수 있으며, 『삼국유사』에 보이는 ‘응유(鷹遊)’, 『제왕운기』에 보이는 ‘응준(鷹準)’, 『양직공도』에 보이는 ‘전라(前羅)’, 『일본서기』 신공기에 보이는 ‘매두라(梅豆羅)’와도 동일한 국명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아가 한국측의 문헌에는 ‘모로(芼老)’, ‘목라(木羅)’, ‘木出(목출)’이라고 차자하여 기록되었을 수도 있으며, 일본측의 문헌에는 ‘모루(牟婁)’, ‘모야(毛野)’, ‘기소궁(紀小弓)’, ‘기각(紀角)’, ‘물(物)’ ‘기생(奇生)’ 등으로 차자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이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맏놀/mot-nor]이라는 국명 즉, 임나(任那)를 이처럼 여러 가지 다른 한자로 표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2)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이름에 대하여
무내숙니(武內宿禰)는 『일본서기』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다. ‘무내숙니(武內宿禰)’를 일본에서는 보통 “타케우치 스쿠네(たけうちすくね)”라 읽고 있고,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한글역주본 『일본서기』에서는 “무내숙녜”라 읽고 있다. 이미 많이 알려져 온 대로 칭하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필자는 “무내숙니”라 칭하기로 하겠다. 당시 실제이름은 [muno-soi] 정도였고 고대한국인의 인명에서라면 [맏쇠]나 [만쇠]에 가까운 이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 때문이다.
무내숙니(武內宿禰)는 『일본서기』 제12대 경행천황기에도 등장하고 제16대 인덕천황기에도 등장한다. 『일본서기』의 연도계산에 의하면 서기 90년 무렵부터 서기 360년까지 실존했던 인물인 셈이다. 정확한 생몰 연도는 논외로 하고, 그가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만 따져 보아도 거의 270년 정도나 된다. 서기 95년(경행천황 25년)에 동북쪽의 여러 나라를 시찰하였으며 267년 후인 서기 362년(인덕천황 50년)에 인덕천황과 노래 문답을 주고받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왕성하게 활동한 기간이 270년 정도라는 말인데,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해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약간의 과장이 섞일 수 있는 법이라고 수긍하려 애써 보지만 과장의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수긍하기가 힘들다. 도저히 신뢰가 가질 않는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불신의 대상이 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이러한 데에 기인한다.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인물이 여러 천황대에 걸쳐 많은 활약을 한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듦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학자들이 그의 실존 가능성을 낮게 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연구자들만 그런 게 아니라 일본의 학자들의 견해도 그런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서기』에 실려있는 대부분의 초창기 천황들처럼 무내숙니(武內宿禰) 역시 후대인들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전설 속의 인물로 여겨지는 게 당연해 보일 정도다. 하지만 필자는 무내숙니가 상상에 의해 창조된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그의 실존 시기는 서기 90년~362년 무렵이 아니라 서기 500년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왜 그렇게 보는가? 이 글은 바로 그에 대한 설명이다.
먼저 『일본서기』에서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경행천황(景行天皇)의 이름 ‘대족언인대별(大足彦忍代別; 오타라시히코오시로와케)’은 『일본서기』 무열기에 보이는 ‘의다랑(意多郞; 오타라)’과도 같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28년조에 보이는 장군 ‘달사(達巳)’와도 같다는 점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리고 일본무존(日本武尊)의 이름 ‘소대존(小碓尊)’은 가야국 마지막왕인 ‘구형왕(仇衡王)’과 이름이 똑같고, 제11대 ‘수인천황(垂仁天皇)’은 구형왕의 아우인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과 이름이 같다고 하였다. 또 14대 중애천황(仲哀天皇)의 이름은 [가슬/kasur]을 사음훈차한 표기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가수리군(加須利君)’과도 같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가실왕(嘉悉王)과도 같다고 한 바 있다. 중애천황(=가수리군, 가실왕)은 법흥왕 19년(5322년) 신라에 항복한 가야국 구형왕(仇衡王)의 둘째아들인데 항복하지 않고 신라에 맞서 싸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경행천황도 500년대 중반의 인물이고 수인천황이나 중애천황, 신공황후도 모두 동시대인 500년대 중반의 인물인 것이다. 이들 천황과 무내숙니가 모두 500년대 중반에 활동했기 때문에 천황기마다 무내숙니가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무내숙니가 무려 300년 가까이 살았던 사람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순전히 『일본서기』의 잘못된 연도 기록을 바탕으로 후대인들이 엉터리 추측을 한 결과이다.
천황기연도 | 서기 | 주요 사건 | |
경행14 | 84 | (무내숙니 출생) 추정 | |
경행25 | 95 | 7월3일 | |
경행27 | 97 | 2월12일 | |
경행51 | 121 | 1월7일(임오삭 무자) | |
성무3 | | 1월7일(계유삭 기묘) | |
중애9 | 200 | 3월1일 | |
| | 4월3일 | |
| | 12월14일 | |
신공1 | 201 | 3월5일 | |
신공13 | 213 | 2월8일 | |
| | 2월17일 | |
신공47 | 247 | 4월 | |
응신7 | 276 | 9월 | |
응신9 | 278 | 4월 | |
인덕1 | 313 | 1월3일 | |
인덕50 | 362 | 3월5일 | |
윤공5 | 415 | 7월14일 묘역 전승비 | |
성무천황 3년조에는 무내숙니가 성무천황과 같은 날에 출생했다고 되어 있고, 성무천황 60년조에는 성무천황이 107세로 사망했다고 되어 있다. 이 사망기록을 바탕으로 역산하여 성무천황의 출생연도가 서기 84년(경행 14년)이라고 추정한 것이며, 무내숙니도 같은 날에 출생했다 하므로 같은 서기 84년(경행 14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경행천황 25년 가을 7월 경진삭 임오에 무내숙니를 보내 북륙(北陸) 및 동방 여러 나라의 지형과 백성의 소식을 살피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일본서기』에는 무내숙니(武內宿禰)가 제12대 경행천황에서부터 제17대 인덕천황까지 무려 5대에 걸쳐 활약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경행천황 25년(서기 95년)에 북륙과 동방의 여러 나라를 시찰한 인물이 인덕천황 50년(서기 362년)에 천황과 노래로 문답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무내숙니(武內宿禰)의 생몰연도는 정확히 알 수가 없는데, 백과사전 등에는 무내숙니가 출생한 연도를 서기 84년(경행천황 14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성무천황 3년조에 성무천황과 무내숙니가 같은 날 태어났다고 한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무천황의 생몰연도가 84년~190년이니까 무내숙니의 출생 역시 같은 해인 84년이라는 것이다. 성무천황이 사망한 연도에서 역산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성무천황은 성무기 60년조에 “여름 6월 기사삭 기묘(11일)에 107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무천황 60년은 서기 190년으로 추정되어왔으므로 출생연도는 서기 84년이라는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날 출생했다는 무내숙니(武內宿禰) 역시 서기 84년에 출생했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얘기다.
하지만 성무천황(成務天皇) 즉위 전기에는 성무천황이 경행천황 46년에 태자가 되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24세였다고 되어 있다. 『일본서기』의 계산으로 하면 경행천황 46년은 서기 116년이다. 116년에 24세라면 서기 93년에 출생했다는 말이 된다. 두 기록이 서로 맞지 않는다.
경행14년(서기 84년)에 출생했다는 설과 경행 23년(서기 93년)에 출생했다는 설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서기』의 연도는 엉터리인 경우가 허다하다. 성무천황과 무내숙니가 같은 날 태어났다고 하는데, 무내숙니의 출생연도는 알 길이 없고 성무천황의 출생연도는 경행 14년(서기 84년) 혹은 경행 23년(서기 93년)의 두 가지 설이 전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수명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무려 300년 가까이 생존했다는 건 좀체로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경행천황 14년(서기 84년)에 출생했다면 경행 25년(서기 95년)에는 불과 12살밖에 안 되는데, 그 어린 나이에 장군이나 대신에게 주어지는 중책을 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행천황 25년(서기 95년) 기록에 “가을 7월 경진삭 임오(3일)에 무내숙니(武內宿禰)를 보내 북륙(北陸) 및 동방 여러 나라의 지형과 백성의 소식을 살피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무내숙니(武內宿禰)의 나이가 겨우 12살이라는 얘기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해도 믿기 힘든 이야기다.
『일본서기』 기록 자체만으로 봐도 불과 열두 살의 나이에 그러한 일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일단 서기 190년의 6월은 기사삭이 맞다. 영남대학교 한보식 교수가 펴낸 연력대전에 의하면 6월이 기사삭인 해는 540년. 성무천황 즉위전기에는 성무천황이 경행천황 46년에 태자가 되었는데 이때 24세였다고 되어 있다. 『일본서기』의 계산으로 하면 경행천황 46년은 서기 116년이다. 116년에 24세라면 서기 92년에 출생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일본서기』 경행기 51년조에는 가을 8월 기유삭 임자(4일)에 치족언존을 황태자로 삼았으며, 같은 날 무내숙니(武內宿禰)를 동량의 대신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태자로 책봉된 연도가 성무천황 즉위전기와 다르다. 만약 이 기록이 옳다면 태자가 될 당시의 나이가 24세이고 경행 51년( 서기 121년)에 태자가 되었으니 그 출생연도는 97년이라 되어야 옳다.
성무천황의 출생연도가 이처럼 기록마다 다르다 보니 같은 날 태어났다는 무내숙니의 생몰연도 역시 추정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무내숙니가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300년 가까이 생존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앞의 표에서 본 바와 같이 무내숙니가 여러 천황기에 걸쳐 260년 동안 왕성하게 활동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결론은 뻔하다. 『일본서기』의 연도가 엉터리이거나 여러 천황기 기록들이 사실상 중복된 기술이거나.
이러한 성무(成務)천황 3년조 기록에는, 무내숙니는 성무천황과 같은 날 태어났다고 되어 있고. 성무천황은 경행천황 46년에 태자가 되었는데 그 때에 24살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경행천황 14년(서기 84년)이 아니라 23년(서기 93년)에 출생했다는 얘기가 된다. 성무천황의 사망 당시 나이를 기준으로 해도 그렇다. 성무천황은 (서기 190년)에 사망했는데 그때 107세였다고 한다. 먼저,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이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고대 한국인의 인명을 보면 부여의 대소(帶素),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 신라 김춘추의 딸 고타소(古陀召),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 등에서 보듯 맨뒤에 [-소]라는 인명조성어를 붙인 이름이 많았다. 현대한국어의 ‘찍쇠(=사진사)’, ‘잡쇠(=형사)’ 등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쇠’는 그 [-소]에 [-이]가 덧붙은 말이다. [소→소이→쇠]의 변천과정을 거쳐 [-쇠]로 정착이 된 것이다. 먹기를 잘하는 사람을 ‘먹쇠’라 하고 치근덕거리기를 잘하는 사람을 ‘껄떡쇠’라 하는데, 이들 단어에 쓰인 [-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으뜸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맏소/맏소이/맏쇠] 또는 [말소/말소이/말쇠]나 [만소/만소이/만쇠]라 일컬었고, 그것이 고려시대의 인명 ‘망소이(亡所伊)’와 같이 표기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의 인명 ‘막금(莫金), 말금(末金), 만금(萬金)’과 같이 표기되기도 하였다. [말/맏/만]은 쉽게 넘나들었던 바, ‘맏아들, 맏딸, 맏누이’에 쓰인 [맏]과 ‘말벌, 말매미’ 등에 쓰인 [말]을 곰곰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이름을 개금(蓋金)이라고도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큰 인물’이라는 뜻의 [가-소]를 [가이소이(개쇠)]라 하였고 그러한 이름을 한자로 ‘蓋金’이라 차자하여 적은 것임을 짐작하게 해 준다. 여기서 상술할 수는 없지만 [가-소]는 [가소이/가손이/가솜이...] 등으로도 불렀던 것으로 추찰된다. 『일본서기』 황극천황 원년(642년)조에 연개소문을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라 표기해 놓은 바,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당시 사람들이 [가소이]를 [가소미]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이나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는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이 [을가솜이]라 일컬었던 이름을 차자한 표기인 것이다. 신라 48대 경문왕의 이름 ‘응렴(膺廉)’ 역시 [가슴]이란 이름을 사음훈차한 표기로 추측되며, 오늘날의 일본여성들 이름에 남아 쓰이고 있는 ‘카스미(かすみ)’ 역시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가솔이/가소이/가손이/가송이/가솜이...] 등으로 끝소리 자음의 발음이 오락가락 넘나드는 것을 두고 필자는 ‘종성자음의 부전(浮轉)’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 바, 이를 염두에 두고 읽으시기 바란다. 그러니까 ‘으뜸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맏-소]라는 이름을 지을 수 있을 것이고, 그 이름을 사람들이 [맏소/말소/만소...] 등으로 불렀을 수 있으며 [소/소이/쇠] 역시 넘나들었을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맏소이/말소이/만소이...]도 부전되었고 [만소이/만손이/만송이/만솜이...]도 부전되었다는 거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응집발음의 경향이 강한 한국어 [만손]을 연진발음의 경향이 강한 일본어에서 소리낸다면 [만손→마나소니]와 같은 식으로 발현될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무내숙니(武內宿禰)’는 바로 그러한 이름을 음차한 표기라는 얘기다. 당시 사람들이 [므나소이l/munsoi] 또는 [므내손이/munesoni]라 불렀던 이름을 “武內宿禰”라고 표기했다는 말이다. 한자 宗에 해당하는 한국고유어는 “맏, 말, 마루”이고, 宗에 해당하는 일본고유어는 ‘므네(むね)’이다. 한국어에서 [말/맏/만]은 쉽게 부전되었으며 [만]으로 부전된 형태와 일본어 무네(むね) 사이에는 응집발음과 연진발음의 경향적 특성이 그대로 적용된 대응관계라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이 동일한 어원에서 분화된 말이란 것도 깨달을 수 있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임나(任那)’는 [맡ᄅᆞ/mot-nor]라 일컬었던 국명을 ‘사음훈차+음차’한 표기이며 음차하여 표기하면 만로국(萬盧國) 혹은 말로국(末盧國)이라 적을 수도 있다고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다. [ᄆᆞᆮᄅᆞ]를 또다른 한자로 차자하면 ‘모루(牟婁)’, ‘목라(木羅)’, ‘목출(木出)’이라 적을 수도 있으며 일본어에서는 ‘모야(毛野; 모노)’, ‘목각(木角; 모츠노)’ 기각(紀角; 모츠노) 기소궁(紀小弓; 모오야)이라고도 적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목라근자(木羅斤資),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 기각숙니(紀角宿禰)’ 같은 이름은 모두 임나(任那) 출신이라는 걸 나타내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상술하였으며, ‘물부련(物部連; 모노베무라지)’에 쓰인 物(모노) 역시 임나국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내숙니(武內宿禰)의 무내(武內) 역시 [맏노] 즉 임나국(말로국)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이름에서부터 임나지역 출신의 인물이거나 임나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는 인물이라는 걸 짐작으로 알 수 있다는 얘기다.
대마도 도주의 성씨인 宗氏 역시 일본어로 무네(むね)라고 하는 말을 표기한 것으로 ‘임나(任那)’와 관련이 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기실 필자는 무내숙니(武內宿禰)가 [무네손이] 정도로 불렀던 이름을 차자한 것이며, ‘기각숙니(紀角宿禰),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와 똑같은 이름을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일본서기』 「웅략기」에 나오는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와 「응신기」에 나오는 ‘기각숙니(紀角宿禰)’는 모두 ‘무내숙니(武內宿禰)’를 한자만 다르게 차자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은 모두 동일한 이름이고 동일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중애원년. 백조를 가로챈 중애천황의 이모제: 蘆髮浦見別王(아시카미노카마미와케노미코)처단.
응신9년. 무내숙니의 동생 감미내숙니(甘美內宿禰; 우마시우치노스쿠네). 壹伎直 眞根子(오야마네코)가 무내숙녜를 도와줌.
칠지도 제작연도: 양무제 7번째 연호 泰淸 4년(550년) 경오년
백제 성왕 28년. 기생성음(奇生聖音)
5월 26일 병오일
천황기연도 | 추정연도 | 주요 사건 | |
경행14 | 84 | 무내숙니 출생 | |
경행25 | 95 | 7월3일 | |
경행27 | 97 | 2월12일 | |
경행51 | 121 | 1월7일 | |
성무3 | | 1월7일 | |
중애9 | 200 | 3월1일 | |
신공 | | 4월3일 | |
신공 | | 12월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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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공원 | 201 | 3월5일 | |
신공13 | 213 | 2월8일 | |
| | 2월17일 | |
신공47 | 247 | 4월 | |
응신7 | 276 | 9월 | |
응신9 | 278 | 4월 | |
인덕1 | 313 | 1월3일 | |
인덕50 | 362 | 3월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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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공5 | 415 | 7월14일 묘역 전승비 | |
무열8 | | 12월 기해(8일)소박뢰천황 사망 | |
| | 임자(21일) 대반금촌련이 “족중언의 5세손 왜언왕 추대” | |
계체1 | 507년 | 1월 신유삭 | |
| | 2월 신묘삭 | |
| | 3월 경신삭 | |
계체2 | 508년 | 10월 신해삭 | |
계체3 | 509년 | | |
계체5 | 511년 | | |
계체6 | 512년 | 4월 신유삭 | |
계체7 | 513년 | 6월 | |
| | 8월 계미삭. 백제태자 순타薨 | |
| | 11월 신해삭 | |
| | 12월 신사삭 | |
계체9 | 515년 | 2월 갑술삭. 문귀장군 | |
계체12 | 518년 | 3월 병신삭 | |
계체17 | 523년 | 백제 무녕왕 사망 | |
계체18 | 524년 | 백제 明王 즉위 | |
계체20 | 526년 | 9월 정유삭 | |
계체21 | 527년 | 6월 임신삭. 근가오야신 파견 | |
| | 8월 신묘삭 | |
계체22 | 528년 | 12월 갑인삭 갑자(11일) 물부추록화 반정진압 | |
계체23 | 529년 | 3월 | |
| | 4월 임자삭. 기능말다간기 | |
계체25 | 531년 | 12월 병신삭 | |
| | 신해 3월. 걸탁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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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일본 최초의 대신(大臣)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12대 게이코 천황부터 16대 닌토쿠 천황까지 무려 여섯 통치자[1]를 모셨다고 한다. 문제는 그 여섯 통치자가 재위기간만 평균 55년쯤은 되다 보니, 스쿠네 본인의 나이는 최소한 280살쯤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생년마저도 혼란스럽다. 일본서기 케이코 천황조에는 케이코 천황 재위 3년(73?)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세이무 천황 조에는 타케우치가 세이무 천황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문제는 세이무 천황의 생년이 일본서기에서도 서술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 일본서기의 서술을 바탕으로 생년을 따지려 해도 세이무 천황조에서 한번은 세이무 천황의 생년이 게이코 천황 재위 14년(84?)인 듯, 또 한번은 게이코 천황 재위 23년(93?)인 듯 서술한다. 즉 일본서기만 보더라도 타케우치의 생년의 후보가 서기 73년, 84년, 93년, 셋이나 된다. 보통은 세이무 천황의 생년이 케이코 재위 14년(84?)이라고 하고, 타케우치의 생년도 같은 해라고 간주한다. 언제 죽었다는 기록은 아예 없으므로 타케우치의 향년에 대해서는 280세, 295세, 306세, 312세, 360세 등 다양한 설이 있고, 대신으로서 일한 기간만 250여 년에 달한다. 그래서 일본에서조차도 타케우치를 보통은 신화적 인물로 본다.
소가(蘇我)씨, 고세(許勢)씨, 기(紀)씨, 헤구리(平群)씨, 카츠라기(葛城)씨, 하타(波多)씨의 시조로 쇼와 18년(1943) 1엔 지폐의 주인공이 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본인 자체로보다는 후손 덕분에 유명해진 인물. 특히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 당시 총참모를 맡았다고 하여 일본 제국 시기 때 의도적으로 더 숭앙되었다. 한편 소가와 하타 등 도래인 계통의 씨족이 조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도래인들의 상징적 시조가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泰□四年(五)月十□日丙午正陽造百練□七支刀□辟百兵宜(復)供侯王□□□□作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泰□ 4년 5월 □일 정오에 여러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여러 병란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후왕(侯王)에게 주어 후왕이 편안하도록 함이 마땅하다..중략..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에게 진기(珍奇)한 칼이 생겼기에, 성음(聖音)께서 (그것을 보시고) 일부러 왜왕(倭王)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뜻을 후세까지 전하여 보여라.」
[출처] 칠지도 명문 올바른 번역|작성자 버드나무
홍계 현종천황 3년조.
기생반숙니(紀生磐宿禰; 키노 이쿠하노스쿠네)가 임나에 웅거하여
이림성에서 백제의 適莫爾解를 죽임. 대산성을 쌓아 동도를 막고...
백제왕은 古爾解와 莫古解 등을 파견하여 대산을 침공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옴.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