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신라와 발해는 200년 동안 통일을 갈망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두 나라가 같은 시기에 망하고 말았다. 발해는 926년 거란에 의해 망하고 신라는 9년 후 935년 내란으로 망했다. 나라가 망한 후 신라의 마의태자와 발해의 대광현 태자가 금강산에서 만나 망국의 한을 달래며 ‘남북국 통일협정서’를 작성하였다. 장차 탄생한 나라는 통일된 조선이어야 한다는 협정서였다.
남·북국은 첨예한 대치 대립 상태에서 통일을 염원하며 남.북국 통일 협상을 56회나 벌였으나 이념이 다른 정치 철학 때문에 민족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비슷한 시기에 망하고 말았다.
1. 남·북국 통일협정서
금강산 유점사 제11 금동 불상의 몸통에서 ‘남북국 통일협정서’가 발견되었다. 신라와 발해가 통일하여 조선이란 나라로 재생한다는 협약서였다. 금강산 유점사를 복원하려고 남북불교 대표 스님들이 장안사에서 만났다. 남한 대표는 일본이 반환한 유점사 금동불상 53점 중에 제11 불상에서 나온 “남북국 통일 협정서”를 내놓았다. 협정서 작성자는 신라와 발해가 망한 후 발해의 대광현 태자와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머물며 부흥 운동을 꾀하다가 ‘통일협정서’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두 태자는 불도의 힘으로 망해버린 조국을 부활하려는 비통한 절규로 협정서를 작성하였다.
발해와 신라, 남북국은 남북통일을 하려고 여러 번 협상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신라의 군신들은 말갈족이 세운 나라완 통일할 수 없다고 발해를 비하하였고 발해는 신라의 삼국통일은 무효라며 기필코 고구려의 옛 주인인 발해가 주도한 통일을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2. 남·북국의 국경분쟁과 대치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구려 군신 대조영은 흑수말갈과 연합하여 나당 연합군에 대항한 고구려 후속 발해를 세웠다. 국력을 키워 2대 무왕 대무예는 장문휴 장군과 이정기 장군을 시켜 당의 산동반도의 등주를 공격하여 제 나라를 세웠다. 점점 강성해진 발해는 당나라에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다급한 당나라는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신라 성덕왕은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 장군에게 10만의 군사를 보냈으나 김윤중은 당에 반기를 들고 퇴각해버리고 전쟁은 발해의 승리로 끝났다. 발해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당나라를 돕는척 하라는 성덕왕의 의향이었다.
신라는 발해의 확장에 위기의식을 갖고 패강진(봉산)에 국경 수비대를 두고 대동강 이남 국경 지역 방어에 초미의 관심을 보였다. 신라 성덕왕은 721년 항주에서 원산에 이르는 국경에 장성을 쌓고 패강진과 단항에 국경 관문을 짓고 서해에서 동해로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른 소위 39도 선을 국경선으로 확정하였다. 국경에서 발해와 신라는 강경한 대립을 하면서도 남북국의 위기는 고조되었다. 그러나 신라와 발해는 2년에 한 번씩 남북 통일문제를 논의하였으나 늘 불발이었다.
발해는 더욱 국력을 키워 대인수 왕은 당나라를 위협할 만큼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남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쪽으로 요동을 차지하여 고구려와 부여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고 북쪽으로 흑수말갈 부족들을 복속시켜 행정구역을 5경 15부 62주로 개편하였다. 당나라는 무섭게 발전하는 발해에 위협을 느끼며 동쪽의 융성한 나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달래었다.
신라는 당과 밀착하여 발해를 위협하였다. 당나라를 추앙하는 신라의 정객들은 발해를 적국으로 생각하였고 발해는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려는 야망으로 신라와 전쟁을 작심하였다. 신라가 당과 손을 잡고 발해를 위협하므로 발해는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발해는 758년 일본과 연합하여 신라 정벌을 추진하였으나 일본의 배신으로 실패하였다. 발해와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은 속 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연합이 중단되자 발해는 독단적으로 신라를 공격할 전면전을 서둘고 있었다. 위기를 느낀 신라 원성왕(790년)은 이길찬을 북국으로 사신을 보내 전쟁 중단을 논의하였다.
“신라에서 당나라군을 몰아내라.” 발해특사의 강경한 주장이었다.
“먼저 일본과 발해의 연합을 중단하라.”
정전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다시 발해는 계속 신라를 치려고 전군을 국경에 대치하였다. 신라 헌덕왕은 812년 9월에 급히 김숭정을 북국에 사신을 보내 정전을 논의하였으나 발해의 반대로 회담은 성립되지 않았다. 발해의 통일정책은 강렬했다. 대결과 화합으로 전쟁 위기를 5번이나 겪으면서 신라와 통일을 논의하였다.
대조영은 신라를 고조선의 동족이라는 생각으로 유대를 강화하였으나 2대 무왕과 3대 문왕은 집권 60여 년간 정복사업으로 신라를 괴롭혔다. 신라 38대 원성왕과 41대 헌덕왕은 전쟁 위기를 모면하려고 발해에 사신을 보내 굴욕적인 교섭으로 사태를 수습하여 30여 년은 남북국은 친화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북국은 계속 통일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남북이 대결하는 동안 거란과 돌궐은 통일을 이룩하고 발해를 위협하였고 신라는 당나라에서 독립하려고 갈등을 초래하였다. 결국 신라주의와 고구려주의 대결로 통일은 무산되었다.
국경은 더욱 강화되어 원산에서 철원평야 양덕을 지나 평양에 이르는 높은 산과 강을 경계로 한 39선 국경에 목책 푯말을 박았으나 항상 국경은 열려 있었다. 국경 관문 단항관에선 남북 상인들의 무역이 성업하였다. 발해는 수도 상경에서 함흥 남경을 통하여 동해안을 따라 원산(단항) 관문까지 와서 신라와 교역을 하였다.
말이 같고 풍습이 같은 남북국의 백성들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었다. 평소에 국경은 고요한 침묵 속에 평화롭지만, 국경 충돌이 있을 땐 삼엄한 경계와 긴장이 고조되었다. 국경 시장엔 주막과 여숙이 형성되었고 남북의 병사들이 얼려 술을 마시며 한 나라처럼 편하게 지냈다.
남북통일 문제는 신라 당나라 숭배 사관과 발해의 민족 동질성 회복 사관이 충돌하였고 당나라의 농간으로 통일 논의는 늘 불발이었다. 점점 평양에서 원산에 이르는 39도 국경선은 영원한 국경선으로 고착되었다.
3. 신라의 위기와 반란 정국
발해의 유학생들이 대거 당나라에 진출하여 뛰어난 재능으로 위상을 높이자 당나라는 발해의 유민을 신라와 동등하게 대하였다. 산둥반도 등주에 신라관과 발해관을 설치하여 양국의 문화 보급과 대민 보호와 유학생 파견을 활성화하였다. 그런 중에 남북국은 적극적으로 사신과 국서를 주고받으며 통일을 논하였다.
발해의 대인선이 왕위에 올랐다. 대인선 왕은 신라와 전면전을 각오하고 전군을 신라국경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국난에 처해 있었다. 신라는 지방 토호의 잦은 반란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885년 헌강왕은 위급한 시대를 맞아 국정이 혼탁하여 보이자 당나라에 공직에 임한 최치원을 불러 개혁을 시도하였다. 최치원의 나이 29세였다.
그는 귀국하여 6두품의 수병부시랑지서로 임명되어 개혁의 기치를 발휘하였다. 마침내 재상이 되어 무너져가는 신라를 바로 세우려고 온갖 정책을 발휘하였다. 발해는 난국을 헤쳐나갈 대안은 통일이라며 최치원을 설득하였다. 최치원은 발해가 주도하는 통일을 거부하였다. 그런데 신라는 진성여왕의 문란한 성 도취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최치원은 직권으로 국가 시무 10조를 발표하여 문란한 국정을 바로잡고 국난극복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토호들이 반박하였다.
“임금이 음란 행각으로 나라를 돌보지 않은데 무슨 개혁인가?”
“임금보다 그대들의 부패가 나라를 망쳤소.” 최치원이 분노하였다.
신라를 없애고 새로운 후백제나 태봉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백성들이 아우성쳤다. 반란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최치원은 이들 반란 세력들을 잡아드렸다. 그러나 진성여왕이 국정을 포기하고 주색잡기로 염문을 뿌리자 민심 이반은 더욱더 악화하였고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전하, 국기를 문란케 하는 호색 행위를 금하십시오.” 최치원이 충언하였다.
“대체 그게 재상이 임금에게 할 소린가?”
“임금의 불륜으로 나라가 망할 지경입니다.”
“절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요.”
불행은 연속되어 견훤이 후백제군에 대야성이 무너졌다. 최치원은 자객을 시켜 진성여왕을 살해하고 태백회를 열어 효공왕(899년)을 세웠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효공왕이 반란군에 살해당하였다. 태백 회의는 효공왕이 후사가 없자 박씨인 신덕왕을 53대 왕위에 올렸다.
4. 발해의 신라 침략과 두제국 멸망
발해의 대소규 재상이 대인선 왕을 배알 하였다.
“전하, 신라가 내분으로 위기를 맞고 있으니 이참에 쳐서 통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면전을 할 힘이 있습니까?”
“전하. 신라는 내홍을 앓고 있어서 치면 깨집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선전포고를 하십시오.”
대소규 재상은 발해군을 국경에 집결시켰다. 원산의 국경을 넘어 신라의 병사들이 무차별 도륙당했다. 국경이 무너지자 신덕왕은 백선일 장군과 최치원 별감을 발해에 사신으로 보냈다. 국경인 단항포에서 발해의 신덕 장군과 대소규 재상 신라 백선일. 최치원이 협상장에 마주 앉았다.
“당장 남침을 멈추시오.” 최치원이 대소규에게 응수했다.
“신라가 통일을 거부하니 발해가 무력으로 복속시켜 통일할 것이다.”
대소규가 당당했다.
“네놈이 결국 소인배 같은 내심을 보이는구나. 그때 당한 수모를 비겁하게 응징하는가?”
최치원이 비아냥거렸다.
“신라는 사라질 것이다. 불같이 일어나는 내분 반란을 어찌 막을 것인가, 이참에 발해가 진정시키고 통일을 할 것이다.”
대소규는 거침없이 내뱉었다. 대소규와 최치원의 해묵은 감정이 폭발하였다. 대소규가 최치원을 증오한 데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당시 최치원은 신라방에선 재원이 뛰어난 학동이었고 대소규는 발해 방에서 최고의 재원이었다. 대소규와 최치원은 학문적으로 경쟁자였다.
그런데 과거시험에서 발해 유학생 오소도가 장원급제를 하였고 대소규와 신라의 이동이가 차석, 최치원이 3등으로 합격을 하였다. 그런데 당나라 황제 소종은 장원급제한 발해의 오소도와 2등인 대소규를 저치고 신라의 최치원을 특채하였다. 소종은 평소 신라인을 친애하였다. 이에 발해의 대소규가 소종에게 따졌다.
“신라의 유학생보다 발해의 유학생이 성적도 우수하고 무예도 출중한데 왜 신라의 유학생만 등용시키는 겁니까?”
“비록 장원은 못 했지만, 최치원은 당나라를 추앙하는 최고의 인재다.”
“학문으로 보나 무예로 보나 내가 최치원보다 못하다는 말인가요? 이는 발해를 깔보는 행위입니다.”
대소규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몰라서 묻나? 신라는 당나라 우방이고 발해는 당이 싫어하는 말갈 국이다.”
이 말을 전해 듣고 격분한 발해의 대위계 왕은 왕자인 대인선과 대소규 등과 발해 유학생을 모두 데리고 돌아와 버렸다.
“어디 두고 보자.”
대소규가 울분했다. 왕자인 대인선이 왕이 되고 동생인 대소규가 재상이 되어 신라를 공격하였다. 대소규 발해군은 국경을 넘어 신라로 들어갔다. 다급하게 궁예는 대소규를 만나 밀담을 하였다. 그리고 발해는 병사를 되돌렸다. 그런데 백두산 화산 폭발하고. 거란이 기회를 포착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결국, 발해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광활한 고구려 영토를 거란에게 영구히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신라는 3국으로 분리되었다가 고려에게 망하였다. 남북국이 망한후 대광현태자와 마의태자가 금강산에서 만나 통일 조국을 논의하였다.
-참고-
신라방과 발해방 유학생들의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한 수: 장원급제(신라3인: 이동이, 최숭우. 최언위. 발해1인: 오소도), 총합격자수:(신라 81명, 발해 12명)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
김용필 danmo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