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초가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다. 도시 빈민이나 농촌이나 하루 세끼 먹고 사느라 바빴던 시절, 어느 중소기업체 사장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주인공의 시점으로 본 이야기다. 그렇다면 2020년대를 살고 있는 지금은 1970년대보다 나아진 것이 있을까. 눈부신 경제발전과 성장을 이룬 지금, 우리는 어찌 살고 있는지 작품을 보며 느껴보기로 하자.
운전기사인 현수는 아내와 함께 네 살 난 딸, 선희를 키우며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주인 내외에게도 선희랑 비슷한 또래의 딸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는 선희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고 노는 걸 좋아한다. 주인 내외는 과자 같은 것으로 선희를 꼬여내서 선희가 자신들의 딸아이에게 머리를 끄들리도록 한다. 현수와 아내는 그런 딸아이가 딱하기도 하지만 셋방살이라 주인 눈치가 보여서 아무 말도 못 한다. 머리가 벌겋게 붓도록 머리를 끄들리면서도 용케 잘 참아내는 딸아이가 대견스럽기도 하다.
비스킷이나 얻어먹으려고 주인집 안방에 건너가 머리를 끄들리며 놀고 있는 딸로 인해 현수는 옛날에 아버지가 송아지에게 굴레를 씌우던 일을 떠올린다. 아무리 아이들 장난이라고 하지만 “이려이려 옳지” 하면서 끄들림을 부추기고 있는 젊은 집주인이 괘씸하지만 중요한 전화가 있어 꾹 참고 있다. 전화기는 주인집 안방에 있어서 중요한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일자리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잔뜩 전화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터였다.
문득 그 옛날 시골에서 송아지에게 굴레를 씌우던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송아지에게 헐겁지 않도록 굴레를 단단히 씌우고 매질해 가며 쟁기질에 길을 들이셨다. 현수는 그러한 혹독한 훈련이 송아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굴레가 헐거우면 송아지에게도 괴롭고 쟁기질을 잘하지 못하면 그 송아지는 바로 도살장행이기에 가학성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결혼 전에 현수는 자신에게 굴레가 씌워진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자신도 피고용인으로서 사장이 씌운 굴레를 쓰고 살아가는 처지임을 느낀다. 그러나 자신의 굴레는 애매하게 헐거워서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괴롭힌다고 느낀다. 현수는 어쩌면 딸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딸 아이가 고통스러운 상황을 훈련받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수는 선희가 가여워지기 시작한다. 울지도 않는 선희를 보면서 자신보다 더 단단한 굴레가 씌워지고 있으니 어린 나이부터 굴레가 씌워지고 있다면 그것을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
“좋아! 도 이제 그깟 전화 따위는 기다리지 않을 참이다. 선희를 다시 데리러 오지 마라. 그래 배속에서부터 끄들 놈, 끄들릴 놈이 따로따로 정해져 나온다더냐. 선흰 날 때부터 끄들리기만 하고 네 애새끼는 끄들 줄만 알게 생겨 났더냔 말이다”
현수는 사지를 엎드려 딸에게 온통 머리를 내맡긴 채 소리소리 야단을 피우고 있었다. 매번 머리를 끄들리기만 하는 딸에게 자신의 머리를 내어주며 머리를 끄들도록 한다. 사랑하는 딸에게 피학의 대물림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가학을 알려주려는 아버지의 마음이 짠하지 않은가. 남은 한평생을 머리끄댕이 붙잡힌 채 살아야 할 딸내미 모습을 안쓰러워하는 가련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가난의 대물림은 아직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정당하게 노력해서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사회, 물질의 있고 없고가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지 않는 사회는 이미 지나갔는지, 오지 않을지 모른다. 어떤 부모에게도 소중하지 않은 자식은 없듯이 사람들 서로가 비인간인 갑질을 일삼는, 사람을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사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촉구하는 작품이다.
[민병식]
시인,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현)대한시문학협회 경기지회장
현)신정문학회 수필 등단 심사위원
2019 강건문화뉴스 올해의 작가상
2020 코스미안상 인문학칼럼 우수상
2021 남명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상
2022 신정문학상 수필 부문 최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