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코스미안상 금상 당선작] 일과 삶, 분리 가능성을 묻다

이진실

 

[당선소감]

 

학문 중에 가장 어려운 게 뭔 줄 아세요? 제 생각엔 인문학이요. 인간이 인간을 연구하는데 답을 찾을 리 만무하잖아요. 결국 답 없는 공부를 하는 거죠. 답 있는 공부도 못하는 머리에, 참 끔찍하네요.

 

주제 중에 가장 곤란한 게 뭔 줄 아세요? 자유요. '이러이러한 것에 관하여 저러저러한 입장에서 서술하시오'하면 참 고마울 텐데, 자유롭게 쓰라니. 허허벌판에 던져진 기분이죠.

 

이 공모전은 둘 다를 했어요. 

인문에 자유 주제라니.

 

어떤 글을 써볼까 생각하다 프랑스인 파스칼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직업의 선택이다. 그런데 우연이 이를 좌우한다" (팡세, 97)

 

한 방 맞은 느낌이었어요. 반박할 수 없었죠. 대학생 때 과외를 시작으로 이후 내 삶 속 대부분의 희로애락은 '일'에서 왔어요. 그런데도 우연히 취업했고, 우연히 이직하고, 우연히 대학원에 왔죠.

 

이 글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에 관해 생각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제 주변에 계신, 한 번의 선택으로 40년을 짜장을 볶아 온 내 아버지를 보게 되었죠. 그리고 자연스럽게 타자를 쳐서 제 생각을 글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인문학이 늘 그렇듯 우리의 답은 없지만, 나만의 답은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사랑하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허락된 날 동안 일의 기쁨과 슬픔 속에서 늙어가려 합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이 자신의 바닷일을 대하듯, 내 일을 대하게 되길 바랍니다. 

 

글을 정제하는 솜씨가 미숙한 저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합니다. 세 명의 아버지 모두 감사드립니다. 

 

 

[금상 당선작] 일과 삶, 분리 가능성을 묻다

 

환갑을 한참 넘긴 아버지는 최근 큰 결단을 내렸다. 40년 넘게 운영해온 중국집을 건강상의 이유로 폐업한 일인데 긴 시간 깊은 고민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저녁이면 온 관절이 쑤셔대 파스를 달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해뜨기 전 침대에서 일어나 새벽시장을 향했고, 어느새 돌아와 가게 문을 열고 대형 프라이팬을 돌려 짜장을 볶았으며 맨손으로 끓는 기름에 탕수육을 튀겼다. 고된 일의 반복. 40년이나 했으니 던져버리고 싶을 듯도 하건만, 오히려 아버지는 더 오래 일하고 싶어 하셨다. 

 

 일이 무엇이기에. 

 

한반도 남쪽 작은 동네에서 아버지는 ‘짜장 아빠’로 통했다. 일주일에 한 번 골목 바로 건너 돌봄교실에 짜장을 가져다주는 아저씨. 그 아저씨는 아이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짜장 아빠 짜장이 최고 맛있어요.’하는 이 한마디로 구현되었다. 한 중년 남성이 중화요리를 맛있게 만드는 사람, 달짝지근한 짜장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가게 문은 닫은 이후 중화요리를 하지 않는 본인을 굉장히 낯설어하셨다. 그곳의 의자와 식탁과 냄비와 주방타일과, 칼과 도마 모든 것이 아버지와 함께 낡아왔다. 

 

오늘날 우리는 일이라는 단어가 인생에서 차지하는 부피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옛날에는 일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서양의 많은 성(last name)들이 종사하는 일에서 유래했는데 예컨대 대장장이라는 뜻의 스미스(smith), 재단사에서 가져온 테일러(taylor), 방앗간 주인을 의미하는 밀러(miller) 등이 있다. 일은 누군가에게 소개될 때 첫 문장에 등장했을 법한 정보였기에 곧 그의 이름처럼 불린 듯하다. 짜장 아빠처럼. 

 

동양에서는 직업이 곧 신분이기도 했다. 사농공상이라고 하여 신분에 따라 종사하는 일이 달랐다. 조선에서는 신분에 따라 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달랐고 단순히 소득 격차를 넘어 사회적 인식에서 각 직업을 분리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직업을 그 사람이 먹고사는 근로 활동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누구이며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나아가 그의 사람됨과 이어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웃 나라 일본은 가업(家業)문화가 발달하여 부모님의 직업을 자녀가 물려받는 사례가 흔했다. 직업을 바꾸는 일은 어지간하면 없었고, 그 직업이 곧 그 사람의 숙명이며 나아가 그 사람 자체로 인식되었다. 그렇기에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고, 신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평생토록 해온 그의‘일’에 관해서 만큼은 전문성을 인정하는 관습이 자리 잡았다. 그들에게 일은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다. 일은 곧 자신이었다. 

 

근래 일에 관한 새로운 풍조가 만연해지고 있다. 출근은 싫고, 사장은 밉고, 일은 마지못해 한다는 사람들. 이들이 상당수 증가하였음은 물론이고 스스로 떳떳하게 생각하며 그렇게 살기를 전도하고 있다. 어쩌면 오늘날 좋아서 일하는 사람은 대단히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관심도 없는 남의 일을 통해 할부와 대출, 보험료, 휴대폰 요금을 메우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직장을 향한다. 오죽하면 전신이 쑤시고 골병든 것 같이 아프다던 사람이 퇴사와 동시에 싹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겠는가. 일이 그만큼 지긋지긋하다는 거다. 

 

세상만사, 마음이 가지 않으면 행동에 드러나는 법이다. 억지로 하는 일에 정성을 쏟을 순 없다. ‘월급루팡’이라는 말이 그 심정을 대변한다. 급여 이상으로 일해주기 싫어 빈둥거리며 인건비를 축내는 게 하나의 로망이 되었으며, 직업적인 목표는 없고 놀고먹기가 소원이다. 커뮤니티에서는 누가 일을 시킬세라 사무실에서 일하는 척, 바쁜 척하는 방법이 생활 정보 인기글에 올라와 있다. 어느 정도 이해도 간다. 열심히 일해봐야 별 이득도 없을 뿐 아니라, 남보다 더 일하는 건 손해 보는 기분이다. 

 

일하기 싫은 마음은 퇴근 이후의 삶에 더 비중을 둔다. 과거 일에서 자신을 찾은 이들과는 반대로 일하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와 일터에서 지었던 가짜 웃음, 가식에서 벗어남을 통해 진짜 나를 되찾고자 한다. 이를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워라벨이란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의미로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됐다. 직장생활과 그 외 삶의 조화를 통해 더 만족스러운 삶의 영역이 확장되고, 나아가 더 높은 생산성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표어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워라벨을 단순히 삶과 일의 분리로 사용한다.

 

과연 일 밖에 행복이 있을까. 사실 일을 마냥‘하기 싫은 일’로 치부하는 건 단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손해가 크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황금기를 일에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6시간에서 8시간 정도 잠을 자니 깨어있는 시간은 16시간에서 18시간 정도이다. 이 중에서 근로에 사용하는 시간은 대개 절반가량일 것이다. 자영업이나 투잡을 뛴다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즉 하루의 3분의 1 이상을 우리는 일하며 보낸다.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은 일하면서 보내는 셈이다. 심지어 근무시간의 대부분은 육체와 정신이 가장 활발한 시간대이며, 일하는 시기는 인생의 황금기와 맞물린다. 이 모든 사실을 감안하면 근로시간의 비중은 삶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일 외에 삶이라고 할 만한 가정이나, 지인모임, 취미생활 등등에서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삶의 절반에 해당하는 일이 단순 생계의 수단으로 억지로 져야만 하는 짐에 불과하다면 행복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결국 직장에서의 나도 진짜 나이고 근로 중의 삶도 내 삶이다. 일도 내 인생의 상당한 일부인 것이다. 일과 삶,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을 하고자 하면 불행하다. 단순히 불행을 넘어 일을 사랑하지 못하는 인생은 찾아오는 발전 가능성을 놓칠 수밖에 없고, 또한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의 기회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오늘날 우리에게 자신의 일부로서 일을 사랑하기란 막연해 보인다.

 

도대체 언제부터 일은 시작된 걸까? 기원전 15세기를 살던 유대인은 일의 시작을 신에게서 부여된 저주로 설명한다. 약속을 어긴 인간을 향해 신이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을 것”이라 선언한다. 이를 고대인들은 인간노동의 기원으로 이해했다. 그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일’이 약속된 셈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는 이 말을 뒷받침해주는 삶을 살고 있다. 

 

많은 중고등학생이 좋은 대학을 가려고 오락과 수면까지 줄여가며 치열하게 노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좋은 곳에서, 내가 원하는 곳에서 ‘일하기’ 위해서이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일하기 위해서 준비되는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끝없이 잠 못 드는 밤과 동트지 않은 새벽부터 시작되는 모든 삶은 일을 준비하거나 일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과연 인생은 일하기 위해 준비되고, 결국 열심히 일하며, 지쳐 널브러질 때까지 일하다가 잠깐 쉬고 죽는 것이다. 

 

사실 인간 편에서도 일은 필요하다. 이는 사람이 아무 일 없이 긴 시간을 보내면 늙는 것과 관계있다. 일을 손에서 놓는 순간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활동량이 줄어서인지 아니면 육신이 맡은바 소임을 다 했다고 스스로 판단해서인지 몰라도 일없이 사는 사람은 본인조차 무기력을 느끼며 산다. 반면 주름이 많고 허리가 굽어져도, 왕성하게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에게선 생명력이 느껴진다. 마치 일하는 지금이 전성기라고 주장하는 듯. 참 아이러니하다. 

 

일은 삶에서 분리시키고자 하지만 결국 삶이고, 힘들지만 하고 있고, 삶에 활력을 줘 살아가게 한다. 인생을 통틀어 자부할 만한 것, 다른 어떤 행위보다 성취감을 보장하는 것. 인생의 멍에인 일 말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렇기에 누구 못지않게 일을 싫어한다고 자부하는 나도, 노동의 숙명이 마냥 저주일 뿐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일은 그 자체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직업 하나로 그 사람을 표현한다는 것이 굉장히 얄팍해진 세상이다. 누군가는 요리사이면서 유튜버이고, 누군가는 회사원이면서 인터넷 쇼핑몰 사장이다. 이직도 쉽고, 계약직과 프리랜서도 많다. 직업관은 계속해서 빠르게 변하고 있고 앞으로는 또 어떻게 변해갈지 모른다. 고속으로 발달하는 기술들이 인간을 점차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있다. 아버지는 한 직업에 평생을 바쳤지만, 내 세대는 여러 직업을 가지고 몇 년마다 직장을 옮기는 일이 보편화되었고, 이제 다음 세대가 자라면 이 직업이라는 게 대부분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또 다른 일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일을 하고 싶고 해야 함으로. 일이란 것에 메여 있는 동안은 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을 평생에 걸쳐 고민하고 이를 위해 애쓸 수밖에 없다. 우리 대다수는 영웅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일에 있어서만큼은 숙명마저 사랑하는 영웅적 자세를 취하는 게 한낱 만용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일은 단순한 취미생활과는 다르다. 쉽고 빠르게 재미를 얻을 수도 없고 때로는 삶의 엄청난 난관이 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마음에 없는 소리도 지어서 해야 하고, 싫은 소리 들어도 참아야 한다. 동시에 이러한 일이 우리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 

 

일은 결코 나와 분리 될 수 없는 지독한 애증으로 얽히고설켜 있기에 결국은 내 편으로 만드는 게 최선이다. 때로 각자의 일을 폄하하는 누군가와 일하기 싫게 만드는 각종 요소들을 이겨내고 일로부터 나를 찾고 내 삶의 기운을 얻자. 결국 일이 곧 나이기에.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일을 사랑하면 일을 벗어남으로써 얻으려 했던 만족이 자연스레 찾아올 것이다. 일이야말로 진정 끝이 없으므로.

 

작성 2022.10.07 10:54 수정 2022.10.07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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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