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밖을 보는 자는 꿈을 꾸고, 안을 보는 자는 깨어난다.
- 칼 융
어릴 적 또래들과 마을 앞 냇가 모래밭에서 많이 놀았다. 뙤약볕에서 나는 모래로 커다란 의자를 만들었다. 의자 팔걸이에는 별을 서너 개씩 새겨 넣었다. 그 어린 나이에 나는 힘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셋집에 살며 주인집 사람들 눈치 보는 게 견디기 힘 들었나 보다. 소작농 자식의 본능이 그런 힘을 간구하게 했을까? 추석날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 아우들에게 가슴에 별이 새겨진 뱃지를 달고 밖으로 나가게 했다.
왜 그러느냐고 의아해하는 표정의 동생들 생각을 묵살하고 골목길을 다니게 했다.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우리는 읍내에서 왔거든!’ 나는 ‘시골 사람들’에게 으스대고 싶었던 것이다. ‘저 사람들이 우리가 읍내 변두리 시골에서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내 안에는 남들보다 더 강해보이고 싶은 ‘힘의 의지’가 아주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하는 ‘힘의 의지’는 자신 안의 힘의 의지를 말하는데, 나는 그 힘의 의지를 밖에서 찾았던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남을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마을에서는 우리 또래 선배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서 다들 큰 도시로 떠나, 우리 또래들이 대장 노릇을 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모아 예비군 훈련까지 시켰다. 어느 날에는 간첩을 잡는다며 한 수상한 사람의 뒤를 쫓기도 했다.
우리는 계급장이 달린 종이 모자를 쓰고 다녔다. 우리 골목대장들은 아직 별을 달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해 대령이하의 무궁화를 몇 개씩 달고 다녔다. 나머지 아이들은 나이에 맞게 계급장을 달게 했다. 우리는 나무 막대기를 총처럼 어깨에 메고 다녔다.
저녁에는 읍내의 태권도장으로 갔다. 한국전쟁 때 폭파된 건물의 바닥을 태권도장으로 쓰고 있었다. 우리는 멀찍이서 보며 그들의 동작을 하나하나 머리로 익혔다. 마을로 돌아와 우리는 태권도 동작들을 재현해 품새들을 만들어냈다.
우리 집 마당에 모여 태권도 품새들을 익히고 겨루기도 했다. 내 또래들이 사범 노릇을 했다. 어릴 적의 골목대장 노릇이 내 안에 ‘DNA’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학창 시절에 반장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아마 가난한 우리 집안이 크게 고려되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소풍을 가면 반장이 담임선생님 도시락을 싸왔다. 그 한이 대학 때 풀어졌다. 어느 날 지도 교수님이 나더러 과대표를 하라고 하셨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반장을 하는구나!’ 하지만 과대표 노릇이 쉽지 않았다. 소소한 일들이 참 많았다. 나는 그때 알았다. ‘짱은 내게 안 맞는구나!’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몇 번 짱을 맡았다.
그때마다 나는 확인했다. ‘짱은 타고나야 하는구나!’ 나는 성격검사를 해보며 알았다. ‘나는 돈키호테구나!’ 나는 오랫동안 돈키호테가 되어 세상을 떠돌았다. ‘혼자 왕이고 혼자 백성인 왕국’ 내가 만든 나의 세계였다.
나는 이제 남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노자는 말했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다 하며, 나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강하다고 한다. 승인자유력, 자승자강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나는 이제 나를 이기려한다. 남을 이기겠다고 발버둥을 치며 살아 온 삶, 꿈같다. 꿈같이 흩어진다.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강하다.” 마음에 깊은 평화가 왔다.
나는 드디어 ‘지족자부(知足者富)’를 알게 되었다. 만족할 줄 아는 나는 항상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제 나로 돌아왔다. 내 안의 힘의 의지가 가난한 집안의 한경에 의해 왜곡되어 그토록 남을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거 마저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잘 넘길 것
- 김경미, <식사법> 부분
시인은 우리에게 멋진 식사법을 제시한다. 그녀는 우리가 이 식사법만 익히면,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잘 넘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