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의 생각 속에 늘 자리하여 있었지만 막상 3~4년 앞으로 다가왔을 때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은퇴(隱退)라는 말은 알 수 없는 공연한 불안감도 데리고 온다. 그즈음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믿었던 사람의 등까지 보게 되었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썩 많지는 않지만 연금(年金)을 받고 씀씀이를 조금 줄이면 그럭저럭 살아가겠지만 문제는 돈 보다도 고독의 문제가 크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은 한창 때인데 말이다.
그때 다가온 것이 ‘고전(古典)과 위인(偉人)의 벼랑’이었다. 고전은 어릴 적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웃집에 있는 고전문학전집을 빌려다 읽어왔던 ‘낯설지 않음’ 덕분에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었고, 위인의 벼랑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견줄 수는 없지만 ‘그의 사당사의(死當死矣)’가 ‘타인의 믿었던 등’과 겹쳐지면서 더욱 각별한 만남이 되었다. 그리고 인생 후반기에 오래도록 동행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J와 둘은 급격히 친해져 갔다. 마치 세상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마지막으로 만난 사이처럼 서로를 격려하고 기대면서 그것은 더욱 깊어졌다. 서로 간의 교감(交感)도 깊이를 더했다.
이처럼 J의 이별(離別)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것이었고 그 깊이는 새로운 채움이었다. 짧지 않은 세월을 앞만 보고 걸으면서 친구들보다 뒤처지면 지는 줄 알고 노심초사(勞心焦思) 뛰기만 했었는데 돌이켜보면 정작 채움은 없었다. 그런데 고전은 단순히 글이 적혀 이어져 온 책이 아니었다. 지혜와 공감은 커다란 채움이었다. 그 순간들은 쫄쫄거리는 시냇물이 아닌 묵묵한 차오름이었고 여유였다. 그래 같이 가길 잘했다. 아마도 더 멀리 갈 것 같다.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고 한 말이 바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별이 준 새로운 만남은 비록 작은 깨달음(?)이었지만 지난날 J에게 다가와 아픔을 주고 사라져 간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의 내면(內面)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는 존재였다. 어쩌면 ‘나를 아프게 한 타인의 등은 봄부터 울어댄 소쩍새였다.’ 이래서 새로운 시작은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고, 조금 빨리 온 듯한 이별이 J에게는 축복이고 행운이었다. 이별의 아쉬움도 있지만 새로운 만남이 더욱 고마운 것이다. 채움엔 비움이 있어야 하듯 새로운 만남에는 이별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두 손에 다 쥘 수는 없다. 결국 J에게 다가온 이별은 아모르파티까지 손잡고 오는 큰 만남을 위한 것이었다.
가을하늘이 높아간다. 구름은 더욱 하얗다. 시간이 되면 이 또한 회색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그래야 내년의 봄을 맞을 수 있다. 벌써부터 내년의 봄이 궁금하다. 스스로에게 기대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별님이 눈물 나게 고맙다. 사계절이 자연의 섭리대로 바통터치를 하듯 나의 시절인연이 다한 것은 지나가고 생각지도 못한 귀한 인연이 오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것을 채우러 당연히 온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것도 모르고 붙잡고 있으려 했던 자신이 부끄럽고 민망하다.
한편으로는 은퇴를 앞두고 했던 고민이 고맙다. 운명적으로 만난 위인의 벼랑이 그렇고 새로운 배움으로 얻게 된 앎의 기쁨도 컸다. 또 30년 넘게 경험해 온 것들을 낯모르는 이들을 위해 나누는 행운도 엄청났다. ‘단 한 명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으로 시작한 작은 봉사(奉仕)가 새로운 만남들을 이어주고, 앎과 실천의 간격을 줄이는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앎의 기쁨으로 스스로 뛰는 심장을 느낀다. 이 모든 것이 이별님 덕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세상 전체가 만남과 이별, 즉 생멸(生滅)을 반복한다. 인생도 어차피 사생유명 사당사의(死生有命 死堂死矣)니 아웅다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지나간 이별님이 고맙다. 이 고마움은 삶의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와도 또 새로운 만남을 위한 것임인즉 기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주고 가볍게 소풍 길을 나설 것이다. 소중한 오늘 J는 이별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일생이 오롯이 함께 온다는 만남의 시 ‘방문객’을 읽는다.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