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나는 어릴 적에 가난이 너무나 싫었다. 셋집을 전전하며 주인집의 눈치를 보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가! 식사는 항상 부실했다. 어머니는 남의 밭에 가서 배춧잎을 주워 오셔서 물을 듬뿍 넣고 쌀을 조금 넣어 멀건 ‘갱식이’라는 죽을 끓였다.
학교에서는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수시로 교무실로 불려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 석고대죄(席藁待罪)하다가 집으로 쫓겨났다. 어린아이는 긴 신작로를 터덜터덜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숨이 막혀온다.
분명 가난은 복이 아니다. 하지만 이 복을 천복(天福), 하늘이 내려주는 복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하늘(신)이 내려주는 복은 최고의 복일 것이다. 세속적인 복을 넘어서는 한량없는 복일 것이다.
인간은 육체와 마음(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둘은 하나인데, 우리 눈에는 둘로 나뉘어 보인다. 우리 눈에는 육체만 보이니, 육체적 복이 복의 전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육체적 안락이 최고의 복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한다. 육체적 안락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안락하게 살게 되면 우울과 권태가 온다. 그래서 바쁘게 살아가지만, 깊은 마음속에서는 삶의 공허감이 밀려온다. ‘인생은 다 그런 거야!’ 중얼거리며 하루하루 무사히... 하루살이로 살아간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의 영혼은 소리친다. ‘인생은 이게 다가 아니야! 더 나은 삶이 있어!’ 이 소리를 치는 영혼이 우리 안에 있다. 이 영혼은 우리의 육체가 약해진 만큼 깨어난다.
눈을 잃으면 영혼의 눈이 깨어난다. 영혼의 복이 천복이다. 나는 30대에 들어서며 이 영혼의 눈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 고물고물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삶을 버리고 집을 떠났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보였다.
오랜 방황 후에 인문학 강의를 하고 글을 쓰게 되며, 가난하셨던 부모님이 남겨주신 너무나 위대한 유산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유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풍요로운 육체만큼 영혼이 빈약해진다. 그런 사람들의 인문학 강의와 글은 상투적이다.
누구나 조금만 공부하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신산한 삶에서 솟아나는 빛과 향이 없다. 인생의 밑바닥을 빡빡 기어 다니며 살아온 사람은 영혼의 눈이 뜨이게 된다. 세상의 이치가 훤히 보인다.
역사의 획을 그은 사람들은 다 빈천한 출신들이다.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말했다.
“늙고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가 극한의 가난을 경험했기에, 그런 위대한 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끝내 자살한 그가 행복했겠느냐?’고.
공자는 일찍이 말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인생은 길이가 아니다. 아무리 긴 세월도 지나고 보면, 한순간이다. 공룡시대를 생각해보자. 한순간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모든 시간은 한순간이다. 중요한 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시간, 폭발하는 시간, 꽃으로 피어나는 시간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그런 시간들이 있다. 영원으로 체험되던 시간들. 찰나가 영원이었다. 고흐의 그림들을 보자. 불멸이 아닌가? 불멸의 시간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지 않는가?
그래서 공자는 이런 시간이라면 하루를 살아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 영혼까지 팔아 젊음의 쾌락을 누리던 파우스트는 어느 순간, 외친다.
“멈춰라! 시간이여! 너 아름답구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우리는 죽어도 좋다! 이런 순간을 알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땅의 복에 연연하지 않게 될 것이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