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용 (수필가/인문학자)
세월을 잘못 보내면 제대로 성숙해 질 수 없습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만족보다 불만에 떠밀려 살고, 좋은 면을 봐 주기보다 나쁜 면을 지적할 때가 더 많습니다.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이미 잘못입니다. 이런 생각의 형식 속에서 비극이 탄생합니다.
비극은 슬픔을 자아내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예술의 형식입니다. ‘죄 없이 죄인이 되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이 비극의 주인공이 처한 운명입니다. 기원전 700년경 헤시오도스가 《신들의 계보》에서 처음으로 프로메테우스라는 인물을 형상화해 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기원전 470년경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이 인물을 무대 위의 주인공으로 연출해 냈습니다. 원래 삼부작이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포박당한 프로메테우스》뿐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335년, 자신의 업적을 인정해 주지 않아 떠나야 했던 아테네로 다시 돌아올 때 《시학》을 들고 왔습니다. 분명 이 작품은 스승 플라톤의 대표작 《국가》와 공공연히 비교되었을 것입니다. 스승이 이상이 좋아 이상향을 좇았다면, 제자는 비극으로 충만한 사람 사는 세상이 좋아 그것을 해명했습니다. 허공을 향했던 이상주의에서 세상을 향한 현실주의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리고 2천 년이 훌쩍 넘어, 1772년경, 23살의 괴테가 〈프로메테우스〉라는 한 편의 시를 써냅니다. 이 시와 함께 질풍노도라는 신세대의 저항 문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습니다. “여기 앉아 나는 인간을 만드노라 / 내 모습 그대로 / 나처럼 / 괴로워하고 울고 / 즐기고 기뻐하며 / 그리고 너의 종족을 존경하지 않는 / 나를 닮은 종족을.”
시의 이념은 분명합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거인은 ‘여기’를 포기하지도 떠나지도 않습니다. 저기 있다는 신들을 향해 선포합니다. ‘여기는 나의 땅!’이라고. 거인은 ‘여기’에서 ‘인간’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습니다. 거인이 자신을 닮은, 거인다운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이 백 년이 흐른 뒤인 1872년에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란 작품을 출판해 냅니다. 비극과 함께 탄생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비극을 참고 견뎌 낸 자가 신이 되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신나게 춤추고 노는 신의 모습을 비극의 현상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신명 나게 노는 자가 신이라는 존재임을 증명해 냈던 것입니다.
고대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개념이 바로 ‘신화神話’입니다. 곧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신들을 이야기하면서 불가사의한 인물을 연상하지 않았습니다. 고대의 신들에겐 하나같이 한계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하늘, 포세이돈은 바다, 이런 식으로 12명의 최고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였을 뿐입니다.
한계에 대한 인식이 신화를 신화답게 해 줍니다. 신들은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한계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진정한 인식을 낳습니다. 인식의 동의어는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한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한계를 모르고 까부는 사람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인식의 부재를 고백하는 꼴입니다. 죄의식은 사람이라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형성해 줍니다. 사람이 처한 죄의 영역은 무궁무진합니다. 그 내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 때문에 사람은 불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생각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의 가능성이 불안을 극단으로 몰아댑니다. 생각이 자유로울수록 불안은 더욱 깊은 심연과 직면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 깊이가 오히려 삶의 고귀함과 숭고함을 연출해 냅니다. ‘태양처럼 몰락하라!’고 외쳤던 비극의 주인공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을 밝히기 위해 가르쳤을 뿐입니다. ‘여기서의 몰락’은 ‘저기서의 비상’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