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에게서 찾을 수 있는 장점 하나

  

 칼럼니스트 노중평





연합뉴스가 윤석열 대통령이 20221121일 김영삼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다고 보도하였다. 나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출근하는 도서관 길에도, “김영삼 대통령의 크신 뜻을 계승하겠다는 케치프레이스를 쓴 현수막이 내걸렸다. 부천의 국힘당에서 내건 현수막이다. 나는 왜 우파를 표방하는 국힘당이 좌파 대통령인 김영삼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케치프레이스를 내걸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본은 연합 뉴스의 보도를 야후 인터넷 판에 전재 보도하였다. 나는 일본에서는 야후가 무슨 생각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김영삼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다는 뉴스를 보도했을까 하는 의문이 또 들었다.

 

나는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김영삼 대통령이 어떤 색깔로 그의 정치 인생을 살았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야 하였다. 나는 나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 김영삼 대통령 묘역 참배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하여, 검색어로 중국 유기백과(維基百科)의 김영삼’, ‘일본 위키페디아의 김영삼’, ‘한국 위키페디아의 김영삼을 찾아 보았다. 세 나라의 유기백과(위키페디아)는 김영삼 대통령에 대하여 쓴 기록의 분량이 각각 달랐다. ‘한국 위키페디아 김영삼의 내용이 가장 충실했고, 분량도 엄청 많았다. 그래서 믿을만한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3가지 기록을 비교해 보기로 하였다. 그렇다고 이 글에 인용하기 위하여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자서전적인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연 김영삼 대통령이 김영삼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좌파(주사파)의 괴수로서의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물론 김영삼 대통령의 좌파 괴수로서의 자격 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좌파 괴수가 아닐 수 있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그에게 씌운 좌파 프레임이 그를 좌파 대통령들의 시조(始祖)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좌파 대통령들의 시조의 지위에서 탈락시킨다면, 좌파 대통령의 시조는 차례를 물려주어 김대중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반전되어 버리니, 다음엔 김대중 대통령이 좌파 대통령의 시조인지 아닌지를 조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좌파 대통령의 시조로 오해받게 된 첫째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 연대에 그가 벌인 민주화 투쟁이, 김대중 민주화 투쟁과 얽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대중 숭배자들이 그에게 덮어씌운 붉은 물세례를 그가 뒤집어쓰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화 투쟁을 했을 때는 거의 모든 국민이 민주화 투쟁과 주사파 난동을 구분할 능력이 없었던 때였다. 나는 당시에 김영삼 대통령도 민주화 투쟁과 주사파 난동을 구별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민주화 투쟁이란 민주주의로 가자는 투쟁을 말한다. 이 민주화 투쟁이 지향하는 바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념으로 내건 기독교적 자유를 기반으로 한 미국식 민주주의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주사파가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북한이 추구하는 전체주의 인민민주주의였다. 당시에 주사파-김일성주의는 국가에서 금기시 하였고, 주사파 신봉자들도 김일성사상을 극비리에 학습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므로 김영삼 대통령이 이 두 민주주의의 미묘한 차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 리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좌익 이념 성향이 뚜렷한 분이므로, 그가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려, 은연중에 김영삼 대통령을 자기 앞에 내세웠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19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식장에서 김대중 김영삼 2분이 칙공 식장 바닥에 드러누워, 볼 상 사나운 몰골이 흑백사진에 찍혀진 것이었다. 이분들은 민주화 투쟁을 구실 삼아, 세계 경제역사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적으로 기록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행과 성공에 대하여, 발목을 잡고 찬물을 끼얹어왔다. 군사 독재 타도, 민주화 투쟁이라는 명분을 네세워 그런 짓을 한 것이었다.

나는 이 퍼포먼스를 공동으로 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에 살았던 상도동의 집을 그가 대통령직에서 퇴임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김영삼 대통령은 좌파나 주사파라면 눈에 불을 켜고 밝히는 돈 냄새 맡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점이 그가 빨갱이 대통령들의 시조로서의 결격사유로 볼 수 있는 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에 사저를 짓고 이사하였고, 노무현과 문재인 두 대통령도 거액을 들여 사저를 짓고 나갔다. 이런 점이 좌파 대통령들의 특징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돈에 대한 무관심이 한국에 IMF를 불러오고 말았다. 그가 박정희 대통령만큼 청렴했다면, 박정희 대통령처럼 국민을 먹여살리는 일에도 힘을 썼어야 하였다. 그가 그렇게 못한 점이 너무나 아쉽다.

 

IMF 사태가 일어났을 때, 이 사태 유발의 절반의 책임은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있다는 설이 있는데, 이 말은 김영삼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말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 중에 서대문 경찰서 정보계 직원들에게 잡혀 닭장차에 실려 난지도 쓰레기 동산에 버려지는 일을 되풀이하였다. 그는 버스가 없는 난지도에서 버스가 다니는 서교동으로 걸어 나와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고생스럽고도 낭만적인 민주투사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민주투사와 주사파를 변별할 변별력이 없었다. 이점이 그가 좌파 프레임을 쓰게 된 이유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에는 그가 좌파 대통령의 누명을 쓰고 돌아다닌다. 이번에 김영삼 대통령 7주기를 맞아, 윤석열 대통령이 그를 참배하지 않았다면, 나는 김영삼 대통령의 행적에 대하여 의문을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행적을 찾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내 기억의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김영상 대통령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어서, 내 기억의 오류를 시정할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한심하고도 딱한 일이었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성 2022.12.05 09:47 수정 2022.12.05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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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