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교육현장은 선배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풍토가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물질주의적 가치관만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지혜이겠지만 윤리도덕의 전통적인 미덕은 땅에 떨어지고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그 경쟁이 바람직하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나 그 경쟁이 윗사람 비위 맞추고 잘 보이기 위한 경쟁이니 민주 의식은 뿌리째 뽑히고 무언의 압력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교단풍토가 되어버려 안타깝다.
교육 발전을 위한 합리적인 말 한마디는 흑백논리에 의해 전교조, 또는 빨갱이 사상이라고 몰아부치고, 관리자의 무능력을 위장하기 위한 교묘한 트릭으로 권력에 맹종을 강요하는 풍토가 잔존하는 한 교육의 혁신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학교 업무가 많은 사람을 우대한다는 조항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업무가 곧 성과는 아니다. 교육현장은 경쟁사회가 아니라 상호협력 사회이고 윤리와 도덕이 중시되는 교육현장이다. 그것을 경영학의 경쟁시스템을 도입하는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다. 필자가 교단에 발을 딛을 무렵인 1970년대 중반 무렵에는 권위주의 시대였고, 교사 경력 2,3년 걸쳐 평생 관리자로 살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합리적인 의견보다는 비합리적인 일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때는 고된 일을 하면도 인화 단결하면서 전제적인 관리자의 권력이 유지되었다.
그것은 서열 중심의 교단 풍토로 윗사람을 공경하는 유교 주의적 사고방식이 그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개혁이 이루어져 교단도 많이 변했다. 4년 임기제로 중임할 수 있어 하자가 없는 한 8년은 관리자 자리가 보장되고 일찍 승진한 사람은 장학 진으로 자리를 옮겨 임기를 다 채우고 정년까지 보장되니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대통령 임기도 5년이고 국회의원 임기도 4년이다. 국회의원의 경우 국민이 원하면 얼마든지 연임을 수 있고, 대학교 총장의 임기도 4년이고 총장직의 임기가 끝나면 원래의 자리인 평교수로 돌아간다.
그런데 초중등학교만 웬일인지 8년에다가 장학사 경력까지 비민주적으로 한 번 자리에 오르면 마르고 닳도록 해 먹는 구조이다. 무언가 석연치 않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학교현장이 가장 비민주적인 권력의 유지로 일관되는 것은 현 시대적인 흐름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본래의 민주적인 취지는 좋았으나 결국 마찬가지가 된 셈이다. 필자가 승진을 못해서 시샘이 나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필자는 본래 남의 간섭 받기를 싫어하고 어린이들과 함께 같이 생활하는 것이 교육자의 길이라고 여겨 관리자의 길을 포기하고 평교사에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교육현장은 필자가 초임 시절에 원로교사들을 존경하고 도와주고 했던 시절과는 너무나 달라 격세지감이다. 관리자들도 마찬가지 일것이다. 관리자가 되기 위해 갖은 수모를 겪어가면서 자리에 올랐는데, 예전처럼 받들어 모시는 교사들은 없고, 담임교사에게 해야 할 민원조차 민주를 빙자한 간이 부은 학부모들이 관리자들에게 전화질을 해 대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죽을 맛이고,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커져 함부로 권한 행사를 할 수가 없으니 억울할 것이다.
관리자의 자리에만 오르면 최고였던 시절에 다른 꿈들을 모두 접고 오직 관리자의 길을 걸었는데 막상 관리자가 되어 보니 자기가 노력했을 때의 관리자와는 딴판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지경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찌할 것인가 시대가 변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속 못 차리고 자신의 눈앞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운 교사들은 사회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권력 지향의 의지를 숨긴 채 권력에 자신의 의견 한 마디 못하고 맹종하는 것을 공직자의 예로 착각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관리자에게 맹종하는 권력 지향 수구 세력들은 다수의 교사들을 억압하는 세력으로 작용하게 된다면 교육 현장의 앞날은 요원하다.
평교사인 노 교사에게는 인사를 안 해도 관리자에게는 깎듯이 과잉 예절을 취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유행가의 구절이 생각날 지경이다. 교육현장이 이래서 쓰겠는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나이 먹은 사람을 존경하고 배려하는 풍토가 아쉽다. 젊은 교사들의 부모는 관리자처럼 높은 지위가 아니어도 존경한다. 학교 현장에서 조차 윗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짓밟아야 이익을 보는 경쟁사회이니 그 밑에서 배운 어린이들은 무엇을 배우겠는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쓰러뜨려야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잠재적인 교육으로 교육현장에서 하고 있는 셈이 아니겠는가?
능력의 평가가 공정하지 못한 교육현장은 능력은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이라는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 교사의 능력은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열심히 가르치는데, 그 가르치는 방법을 터득하게 위해 부단한 연수를 해야 하는 전문직이다. 초임 시절 임용고사를 치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바람직한 교사상은 임용과 동시에 사라지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줄서기 대열을 조장하는 교육풍토는 교육혁신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공염불일 수밖에 없다.
교육혁신은 사람됨에서 시작하고 그 끝도 사람됨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제자가 스승을 폭력하고 학부모가 교사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풍토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학부모들은 교육현장에서 어린 시절 목소리가 큰 사람, 줄을 잘 서고 돈 있고 배경만 있으면 불합리한 교육현장에서 잠재적인 교육과정으로 학습되어 스승을 존경하지 못하고 동물적인 근성만 앞세워 폭력을 휘두른 것이고, 그 잘못된 양육 태도는 자기 자녀를 폭력적인 상황으로 몰고 갔을 것이다.
예의라는 합리화로 지나치게 권력자에 예를 갖추고 힘없는 사람은 짓밟고서는 사람의 짓이 아니다. 예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함께 가꾸어나가는 사회적인 아름다운 미덕이다. 관리자가 먼저 깍듯이 예를 갖추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아랫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줄 때 진정한 존경심이 우러나올 것이다. 자기보다 나이가 더 먹은 선배 교사를 관리자라는 직분으로 무시하는 것은 관리자의 인격에 문제가 있다. 지위가 높든 낮든 원로교사를 존중하고 배려할 때 아름다운 교직 사회가 조성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교육 동지로써 함께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교직 사회, 관리자나 승진하지 않는 평교사나 내일모레는 교단을 물려나야 한다. 물려 나서도 관리자 행세를 할 것인가? 자신이 잘나고 능력이 있어서 승진한 것이 아니라 점수관리 잘해서 승진하게 된 것이 그리 자랑스러운 일만은 아니다. 능력이 모자라 관리자가 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짊어진 어린이들의 교육을 부실이 한 큰 죄를 짓고 있는지 자성해볼 때이다.
높은 지위는 책임이 많이 따르고 죄를 많이 짓게 된다. 관리자보다 죄를 덜 짓는다는 위안과 어린이와 함께 교육 현장에서 병사와 같이 싸워왔다고 자부하고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결코 관리자보다 못나서 승진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눈치가 빠르지 못하고 사회생활에 우둔해서 그렇다 치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육동지의 따뜻한 배려와 후배 교사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교직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데 일조해야 교육개혁에 협조하는 길임을 기억하자.
“계급은 다르지만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전우들 곁에 묻고 싶다” 유언을 남기고 장군이었으면서도 병사의 묘역이 묻힌 채명신 장군의 훌륭한 정신으로 공직자의 길을 걷는 것이 바른길이 아닐까?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교육 동지 의식을 드높이고 일생을 참다운 군인으로 살다 가신 채명신 장군 같은 훌륭한 관리자가 많아야 교육개혁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한 번쯤 다 같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김관식 시인]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김관식 kks419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