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량이 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조금 전에는 걸어가더니 지금은 멈추었고, 조금 전에는 앉아있더니 지금은 일어섰으니 왜 그렇게 줏대가 없는 것이요?”
그림자가 대답하였다.
“내가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소? 내가 의존하는 그것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소?”
- 장자, <장자 제2편 제물론(齊物論)>에서
그림자는 나에게 의존한다. ‘나’라는 큰 것에 의존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 이 생각이 발전하면 고대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의 ‘이데아’가 된다. 플라톤은 ‘우리가 보는 것들(현상)은 다 헛것(가상)’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의 이데아(본질)는 따로 있다고 말한다.
이 사상이 중세 유럽의 기독교와 만나면서, 천국 개념이 생겨났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헛것이야!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해!’ 그러다 17세기에 과학혁명이 일어나며, 하늘에 천국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신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인간 중심의 근대사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신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가 열어젖힌 ‘현대 철학’은 신이 죽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지혜들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신이 죽은 시대, ‘신이 창조한 것만 남은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안타깝게 묻는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해? 도대체 무엇에 의존하여 살아가야 하느냐고?’
엄청난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 의존하며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보다 무언가 더 큰 것에 의존한다는 생각은 망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에게 줏대가 없다고 타박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지어낸 착각이다. 장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당신의 그림자보다 더 위대해?” “그럼 당신이 편하게 앉아 의존하고 있는 의자가 당신보다 더 위대하겠네?”
큰 나무의 나뭇가지 하나에 편안하게 앉아 쉬고 있는 새. 나무와 나뭇가지와 새는 어느 게 가장 위대한가? 우리 눈에는 어느 게 더 크고 위대해 보이지만, 나무 입장이 되어 보라! 나무에게 나뭇가지가 없다면, 나무는 살아갈 수 있는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가 없다면, 이 세상의 새들이 다 사라져버린다면? 나무들이 지금처럼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삼라만상은 서로 의존하며 존재한다. 누가 더 위대하고 하찮은 것은 없다. 다 똑같이 소중하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뱀이 기어 다닐 때 의존하는 비늘, 하지만 뱀이 없다면 비늘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어서 또 묻는다. “매미가 날아다닐 때 의존하는 날개, 하지만 매미가 없다면 날개는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태양이 위대하다고 칭송한다. 하지만 이 지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면, 잿빛 세상에서 저 혼자 불타고 있는 태양이 위대해 보일까?
처음부터 ‘큰 것’은 없었다. ‘작은 것’도 없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었다. 다 우리의 생각이 지어낸 허상들이다. 신이 죽은 것은 우리의 허상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시 신을 만들고 싶어 한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영화, 소설, 게임들은 대개 큰 것을 다루고 있다. 전생과 현생과 내세를 오가고, 지구와 다른 별을 오간다. 우리는 다시 상상으로 큰 것을 만들어내어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인생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존 전략이 성공할까? 이것은 유아(乳兒)의 심리다. 어른에게 의존해야 살아가던 유아의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어른이 되어야 한다. 장자처럼 인간으로 살아가다 밤이 되면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명상을 해보면 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 ‘지금 여기’가 더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부족함이 없는 마음’이 장자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마음을 잃어버린 시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