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4년에 전란 중 공을 세운 신하들에 대한 평가를 하여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을 선정했다. 호성공신은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호위하며 의주까지 따라간 공이 있다고 인정받은 신하들이다. 선무공신은 전투 현장에서 직접 왜적과 싸웠거나 명나라 군사를 도운 공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호성공신은 3등급으로 나누어 86명을 선정했다. 1등은 이항복과 정곤수 두 명이며, 2등은 신성군, 정원군, 이원익, 윤두수, 류성룡 등 31명이다. 3등은 정탁, 이헌국, 유희림 등 53명이 선정되었다. 이들 공신에게는 등급에 따라 특전이 주어졌다. 그런데 86명의 호성공신 중에는 내시 24명, 임금의 말고삐를 잡거나 수레를 끄는 이마(理馬) 6명, 왕명을 전달하는 하급관리 2명도 포함되었다. 이 가운데는 말을 치료하는 수의사인 마의(馬醫)까지 있었다.
호성공신이 86명인데 반해 일선에서 싸운 선무공신은 18명에 불과하다. 선무 1등공신에는 이순신, 권율, 원균이 선정되었다. 2등에는 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 5인이 선정되었다. 3등에는 정기원, 권협, 유사원,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입부 李純信), 기효근, 이운룡 등 10명이 선정되었다.
공신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선조의 입김이 작용하고 당파적 이해가 엇갈려 선무공신의 선정이 지나치게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의 전공과도 다르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개전 초기에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곽재우, 정인홍, 김면, 김천일, 고경명, 조헌 등이 모두 제외되었다.
선조는 자신의 마부였던 오연의에게 호성공신 교서를 내리면서 "낮은 신분이지만 임금의 수레와 세자의 출정에 말고삐를 잡은 공을 이루었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 마부의 역할을 다했다"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은 상은커녕 벌을 받기도 했다. 의병장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 혐의로 곽재우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혹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이를 지켜본 곽재우도 만년에 종적을 감추고 숨어서 지냈다.
이런 공신 녹훈 과정을 지켜본 당대의 사관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조실록 1604년 6월 25일 기사에는 “의병을 일으킨 정인홍, 김면, 곽재우, 김천일, 고경명, 조헌 등은 공신 명단에서 빠졌다. (중략) 호성공신은 80명이 넘는데 그중에 내시가 24명이며 미천한 자가 또 20여 명이다. 이 얼마나 외람된 일인가.”라고 기록했다.
임진왜란 공신 녹훈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면 이른바 '문고리 권력'들이 현장에서 사력을 다해 싸운 사람들의 공로를 가로챈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국가나 기업 경영에서 이러한 폐해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지도자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간신들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경계해야 한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