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는 주인공 오네긴의 ‘어긋난 사랑’이 나온다.
권태에 빠져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냉소적인 귀족 청년 오네긴과 독서를 좋아하고 사색을 즐기는 열정적인 시골 처녀 타티아나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 타티아나는 오네긴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다.
‘이제까지의 제 인생은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어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교활한 유혹자인가요, 아니면 제 수호천사인가요? 제 운명을 이제 당신 손에 맡깁니다.’
하지만 편지를 받은 오네긴은 타티아나를 만나 훈계를 한다.
“스스로의 열정을 이성으로 다스리는 법을 배우셔야 해요. 다른 사람은 당신의 미숙함을 악용하려 들지도 몰라요.”
오네긴은 친구를 결투로 죽게 한 후 러시아를 떠나 긴 여행을 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타티아나는 그레민 공과 결혼하여 공작부인이 되었다. 환멸과 죄책감에 빠져 있던 오네긴은 그레민 공의 저택에서 열린 무도회장에서 타티아나를 발견하게 된다.
오네긴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타티아나에게 열정적인 편지를 보낸다. 타티아나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자신은 이미 결혼한 여자이며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로 남겠다고 말하며 오네긴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오네긴의 삶의 신조는 “나의 법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였다. 푸시킨은 오네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 가여워라. 모든 걸 미리 아는 까닭에 언제나 명료한 정신으로 모든 행동, 모든 말을 자기 혼자 번역하며 증오하고, 가슴은 경험으로 싸늘해져 공상에도 빠질 수 없는 그대여!’
오네긴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정신주의였다. 그는 몸으로 살지 않고 관념적으로 살았다. 우리는 몸으로 살아야 한다. 몸이 바로 정신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한 생각에 빠지게 되면, 몸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타티아나에게서 사랑의 편지를 받았을 때, 오네긴의 몸은 분명히 사랑으로 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공상에도 빠질 수 없는 정신’은 그의 몸을 딱딱하게 굳어버리게 했을 것이다.
오랜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야 그는 타티아나에 대한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제 몸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람은 바닥으로 떨어져야 온전한 몸이 된다. 바닥에 널브러진 몸은 맑디맑은 정신이다.
나도 오랫동안 정신적인 사랑을 했다. ‘플라토닉 사랑’이었다. 이상적인 사랑을 찾아다니며 나는 차츰 메말라갔다. 20대가 다 가던 어느 날, 나는 내 안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제 몸으로 살아라!’
한 청순한 처녀를 만났다. 달빛이 환하게 내리비치는 긴 신작로를 그녀와 함께 걸으며 나는 말했다.
“저 앞에 단두대가 있다고 해도 계속 걸어갈 거야!”
이제 플라토닉 사랑은 플라스틱 사랑으로 조롱을 받고 있다. 사랑은 썩지도 않는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은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으로 거듭나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울고 있을까?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