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희의 인간로드] 시간의 전사 ‘리기’

전명희

나는 삼만 이천 년 전 인간 ‘리기’다. 나의 삶은 지루할 틈이 없는 재밌고 신나는 완벽한 삶이다. 내 삶이 완벽하고 명쾌하고 단순한 건 자연을 닮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좇아 들판을 달리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춤을 춘다. 태양이 높게 뜬 낮에는 사람들과 함께 사슴이나 소, 사자 같은 들짐승을 사냥하러 들판을 휘젓고 다니고 별들이 속삭이는 밤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옛이야기를 듣는다. 

 

하늘의 북극성을 따라 이곳에 정착한 조상들의 이야기는 날 새는 줄 모르고 듣는 신비한 이야기다. 그중에 제일 재밌는 이야기는 사자를 사냥하면서 왼팔을 잃었던 할아버지 이야기와 매머드의 뿔을 잘라 허리에 차고 다녔던 용감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다. 

 

나도 아버지처럼 사냥을 잘한다. 사냥은 아주 재밌다. 그런 나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용감하고 인기 많은 남자이지만 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바로 저 산 아래 있는 동굴이다. 그 동굴은 우리의 시간이 저장된 은밀하고 신비로운 곳이다.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는 시간의 마법이 펼쳐진 곳이다. 

 

시간이라는 관념이 만들어 낸 완전한 실재가 드러나도록 나는 동굴에서 소, 매머드, 말, 사슴 등을 그린다. 내가 그리는 동물들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아름답다고 모두 입을 모아 칭찬한다. 나는 우리 부족의 안녕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자손을 많이 낳기를 원하며 그림을 그리고 사냥을 나가면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그림을 그린다. 하늘신과 땅신에게 간절한 마음을 다해 기도하며 그린다. 그렇게 동굴벽과 천정에 그림을 그리고 나면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한지 모른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사람들은 나를 ‘리기’라는 부른다. 처음부터 그림을 잘 그린 건 아니다. 나는 자연이나 동물이나 사람을 유심하게 관찰하는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 그런 뛰어남은 타고났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유심하게 관찰한 대상을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가 동굴벽이나 천장에 그림으로 표현한다. 타다 남은 검은 숫과 고운 황토, 으깬 꽃잎과 풀잎, 잘 쪼갠 돌과 꼬챙이 등 주변에 있는 자연적인 것들을 도구 삼아 그림을 그린다. 

 

울퉁불퉁한 동굴벽은 내 그림 솜씨를 뽐내기에 더욱 좋은 조건이다. 편편한 곳보다 더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거기에 더해 상상력까지 불어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뾰족한 꼬챙이나 돌로 쪼거나 새기고 색을 입힌다. 입체감을 주기 위해 어떤 그림은 황토를 잘 개어서 덧바른다. 그렇게 해도 간혹 떨어지는 곳이 있을 때는 사냥해서 잡은 동물 기름을 모았다가 접착제로 쓰면 그림이 떨어지지 않고 아주 좋다. 

 

내가 그린 그림은 사실적이고 섬세하며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 넘친다. 사람들은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달래고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소망을 빌기도 한다. 동물이나 다른 부족으로부터 우리 부족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기도 한다. 내 그림은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대서사시다. 변화가 만들어낸 시간의 전사다. 삶의 파노라마다. 창작의 시조이자 예술의 발견이다. 그렇다. 나는 선사시대 화가이며 미디어아트 연출가인 ‘리기’다.

 

나는 만족을 아는 인간이다. 부족한 것이 없으니 다 가진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때때로 시련을 주고 친절하지 않지만 나는 그런 자연 속에서 성장하고 배려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자연 그 자체다. 내가 바로 자연인데 자연과 나를 따로 구분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하기에 매 순간 발끝에서 피어나는 자연의 촉감을 느낀다. 

 

그뿐이던가 나를 보호해 주는 가족이 있고 부족들이 있다. 동물을 사냥하는 강력한 힘이 있으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고마운 동굴과 무한한 상상력이 나를 만족하게 해 준다. 거기에 더해 나를 사랑하는 그녀가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일인가. 나는 이 동굴에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그녀와 같이 살 예정이다. 이 동굴에서 신성한 예식을 올리고 하늘신과 땅신에게 감사의 제를 지낼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하고 완벽한 삶인가. 

 

나는 자연과 교감하는 존재다. 자연은 내 느낌을 알고 어루만진다. 계획 없는 자연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과 교감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내 그림도 마찬가지다. 변화라는 시간의 행진 속으로 자연과 인간의 흔적을 그림으로 남긴다. 존재는 시간으로 굴러가고 그 시간은 불규칙한 패턴으로 실재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자이면서 패턴을 지배하는 시간의 전사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자연의 대리인이며 인간 탐구의 연구자다. 내가 서서히 시간에서 깨어나고 삶에서 진보하고 있듯이 운 좋은 지구는 태양과 아낌없는 교감을 하면서 생명의 역사를 써 간다. 

 

맞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예술의 기원을 연 나는 선사시대를 즐겁고 신나게 살아낸 시간의 전사 ‘리기’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고 증명하되 증명하지 못한 인간의 역사이며 예술의 역사이다. 나, ‘리기’는 바로 당신이며 당신의 고유한 종자다. 당신은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나를 인정해도 당신이고 인정하지 않아도 당신이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이메일 jmh1016@yahoo.com

 

작성 2023.01.23 08:58 수정 2023.01.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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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