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위에 호칭을 바꾼다고 하여 신분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낮은 신분을 좋은 호칭으로 불러주는 것은 무척 낮은 신분 사람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일 것이다. 옛날이야기에 소, 돼지고기를 파는 만득이라는 백정에게 한 사람은 “김 서방”이라는 호칭을 불러주는 사람에게 고기의 양을 많이 주고, “만득이”라고 낮춰 부른 사람에게는 고기의 양을 더 적게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상대를 기분 좋게 높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하여 백정이라는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잡일을 맡에 하시는 분을 높여 주무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주무관”, “장학관”, “이사관” 등 관자가 붙으면 무척 높은 직위에 대한 호칭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잡일 하는 사람을 교육계의 높은 자리인 “관”자를 붙여 “장학관”급과 동일한 칭호를 주어 부르는 것은 과분한 호칭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라고 존재성의 인식에 따라 상대방의 위상이 달라진다.
따라서 못된 주무관은 실제로 자신의 신분이 높아지는 줄 알고 교사들보다 높은 “장학관”서열의 “주무관”인양 제 분수도 모르고 단순히 호칭이 주는 위상에 걸맞게 거드름을 피우는 난센스가 발생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학교를 찾아오는 학부모가 “주무관”이라는 호칭을 듣고 교장보다 더 높은 손님이 학교를 방문했나보다고 깍듯이 예의를 표하는 해프닝이 일어나는 일까지도 있을 것이다.
옛날 일제강점기 시절에 “소사”라고 부르는 명칭으로 선생님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그들을 “아저씨”라 부르기도 하고 높여서 “기사”라고 불러왔다. 정식명칭을 “방호원”이라는 칭호까지 주어진 적도 있었다. 옛날 학교에서는 온갖 궂은일은 이분들이 다 하고 심지어는 선생님들의 개인적인 심부름까지도 군말 없이 해주었다.
그러나 “주무관”이라는 호칭이 바뀌고부터서인지 사회 문화 환경이 바뀐 탓이겠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 신분의 호칭처럼 도도해졌다. 호칭을 “주무관”으로 깍듯이 부르지 않는 교사는 면박을 당하기 쉽다. 문제는 외국인에게 주무관을 그대로 통역하였을 때 외국인은 교장보다 더 높은 직위로 인식할 개연성이 있다. 세계화시대 우리나라만의 호칭 존경을 이상해할 외국인들이 많을 것으로 안다.
외국에서는 일하는 직위의 명칭이 바뀌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교장과 교사의 명칭은 바뀌지 않듯이 말이다. 사람이 사람대접 받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영양사가 영양교사로 학교 다닐 때 교육학을 이수했는지 모르지만 교육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학교 급식소에 취업이 되어 집단행동으로 영양사를 영양교사로 불러 달라해서 호칭 변경이 되었다.
물론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이외의 사람들은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듣고 싶을 것이다. “주무관”도 학교에서 일하니 교육관계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행정실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호칭은 직접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이어야 한다. 행정실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서 행정실 직원에게 “선생님” 호칭으로 부르라고 호칭 변경을 아무 생각 없이 감행한 관리자도 더러 있었다.
교장, 교감이 관리자가 되면 어린이 교육은 딴전이고 학교관리나 행정일에만 신경을 쏟아 선생님이라는 칭호가 없어질 상황(?)인데 학교 종사자가 다 선생님이어서는 안 된다. 조리사 선생님, 사서 자격증도 없이 도서 대출 업무만 보는 사람도 사서 선생님, 실무사 선생님, 주무관 선생님 등 학교 종사자를 높여 불러주는 것이 좋겠지만, 어린이들에게 선생님의 호칭에 대한 혼란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포괄적으로 모두 선생님은 분명하다. 그들의 언행은 선생님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분한 호칭을 주어 어린이들에게 개념을 혼동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교단에서 퇴직하여 물러나게 되면 칭호를 한 계급 올려서 호칭만 바꿔준다. 평교사를 교감으로, 교감으로 재직한 분은 교장으로, 교장으로 재직한 분은 장학관으로 칭호가 바뀐다. 부르는 칭호가 달라진 것 이외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사회에 나가 높은 한 계급 높여 교직자의 신분 상승을 노리자는 취지는 좋은데 누가 그것을 인정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바로 공식적인 칭호 남발에 지나지 않는다.
선생님이었으면 됐지 퇴직 후 신분을 높인들 사회인들이 높여주지도 않는다. 그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존경을 받기도 하고 멸시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옛날 선생님이 부족할 때는 학교 급사나 소사가 선생님 되기도 했었다. 6.25전쟁 시에는 빨갱이들이 나타나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오지 근무 희망자에게 교사를 교장 신분으로 발령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두 근무를 기피하는 낙도에 교사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하여 근무지원자에게 교장 자격을 주는 한지교장제도가 한때 한시적으로 있긴 있었다.
정작 교육자의 칭호 변경은 종사자에게 할 것이 아니라 대학교처럼 강사-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교수 등의 세분화된 교사 명칭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다. 초중등에서는 젊은 교사나 경력 교사는 같이 맞먹고 교장이 임명하는 부장 교사는 임시지만 급을 높이려고 해서는 교사 간의 신분이 명확하지 않아서 젊은 교사가 아버지뻘 되는 교사와 맞먹고 교장교감한테는 굽실거려도 교장과 연령이 같은 노교사들에게는 본체만체하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위에 인사하는 우스운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정작 고쳐야 할 교사 간의 교사 등급 칭호는 고치지 않고 교장의 임명권을 강화하여 부장 교사를 임명하여 높여 부르게 하는 것은 헌법의 평등권 위헌사항이 아닐지 모르겠다. 물론 교사의 급을 2급 정교사. 1급 정교사, 교감, 교장의 직위 구별은 있으나 사문화된 것이다. 엄격히 수습 교사, 전임교사, 부장 교사, 원로교사, 등 분명한 교사 간의 권한을 부여하는 신분 구분의 칭호가 필요하다. 이렇지 않고서는 경력 간의 격차가 없이 같이 맞먹는 교장의 임명권을 받는 부장 교사만 존경받는 교장 권력 강화는 분명 위헌요소가 있다는 생각이다.
민주적인 생활 태도는 본보기는 학교인 만큼 한 학교의 조직이나 운영 등이 비민주적인 것들을 과감히 개혁하는 것이 국회위원들이 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존재하다 떠나간다. 그러나 후손들에게만큼은 좀 더 떳떳한 세상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다 같이 생각해볼 때이다.
[김관식]
시인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