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용 (수필가/인문학자)
지난주 칼럼을 읽은 독자는 또 다시 질문을 해 왔습니다. ‘도대체 뭐가 다른가?’ ‘이것과 저것 사이에 무엇이 다른 것인가?’ ‘디오니소스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사이에 무엇이 다른가?’ ‘그 다름 자체를 설명하라!’ 하고 요구를 해 왔습니다. 그런 질문들 속에서 상당히 격앙된 감정까지 감지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불찰입니다. 나의 설명이 부족한 탓입니다.
또 칼럼의 속성상 사진을 보여 주며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저 말로만 설명에 임해야 하는 답답함은 나로서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발전된 문명의 도움으로, 즉 기계의 도움으로 사진이나 영상 자료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디오니소스’와 ‘예수’라는 개념만으로도 이들이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입니다. 신은 신인데 예수가 아닌 신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아니 예수의 형식과는 정반대의 신성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술의 효능을 인정하고 나면 그 술이 빚어내는 결과 또한 쉽게 예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디오니소스는 축제의 신입니다. 서로 어울려 흥겹게 노는 장면을 연상하면 됩니다. 축제와 디오니소스는 늘 공존합니다.
이제 좀더 철학적 이념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망아忘我의 신, 즉 자신我이 누군지 잊어버리는 형식의 신입니다. 이 형식 속의 자기는 무無의 형식으로만 인식됩니다. 무가 인식되고 나면, 무가 무로 머물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나는 자주 범종의 비유를 들며 설명에 임했던 것입니다. 범종이야말로 공空과 무無로 가득 채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전이 보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몰라도 긍정적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반전의 핵심입니다. 몰라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개념을 동원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서 ‘무아지경’이 실현됩니다. 자기 자신我이 무無의 존재로 인식되어도 상관없다는, 오히려 그런 지경이 최고의 형식을 깨닫게 해 준다는 이념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을 때 진정한 행복이 도래합니다. 그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에 안에서 나오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명 나게 논다!’는 표현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신들린 사람’이 될 뿐입니다. 그때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디오니소스에 대한 설명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 속에 거의 절반을 차지하며 이뤄지고 있습니다. 비극에 대한 인식이 들면, 생로병사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면, 어두웠던 심연은 별빛으로 채워진 밤하늘을 연출해 낼 것입니다. 심연을 들여다보며 지옥 따위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연이야말로 생각하는 존재가 생각으로 춤을 출 수 있는 무대인 것입니다.
비극이 탄생할 수 있는 비결을 깨닫고 나면, 삶이 생지옥으로 설명된다 해도 스스로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바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겁내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등장할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타일렀던 것처럼, 삶의 현장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니체의 응원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삶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삶을 대하는 우리가 잘못일 뿐입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정반대인 십자가에 못 박힌 자에 대해서는 사실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중세 이후,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하지만 중세 기독교의 교리가 설명하는 그런 배타적인 형식이 아니라, 반대도 인정하고 떠안을 수 있는 존재의 포용적인 형식으로 전환할 수만 있다면, 니체의 철학도 함께 놀자고 다가 설 것입니다. 선과 악이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선악의 저편은 이상향이 되어 복음 소식을 전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