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 칼럼] 논밭갈이를 하는 사람들

김태식

입춘을 지나고 우수까지 보냈으니 약간의 더위까지 느껴질 정도로 날씨가 포근하다. 산수유는 어느새 피웠다 지고 청매실과 홍매실 그리고 하얀매실 꽃이 피었다 싶었는데 이제는 그 흔적들 위로 초록 잎들이 돋아나고 있다. 봄꽃들은 바쁘게 피었다가 바람이 휙휙 불고 난 뒤에 어느새 그 화려했던 자취를 감추고 길거리에 화우花雨만 뿌리고 떠나갔다. 

 

봄기운이 스멀스멀 오르는 들판은 농부들의 손길에 의해 논갈이가 시작되었다. 기계음을 내는 트랙터의 앞에 달려 있는 날이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흙을 파헤치며 나아간다. 이불처럼 덮고 있던 흙들을 밀어내니 싱싱한 땅바닥이 조금씩 드러난다.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가 논두렁을 정리하는데 걸음걸이도 수월하게 보이지 않으니 그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쪽에 놓여있는 두엄더미에서는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나는 은은한 고향의 냄새가 모락모락 묻어난다. 

 

다른 논에서는 겨울 동안 빈 땅으로 그냥 내버려 두기가 아까워 심어 놓은 보리가 한창 자라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보리밭 밟기를 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요즈음에는 풍족한 식량 덕분에 보리농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60여 년 전만 해도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식량이었다. 그러한 보리를 보고 있노라니 겨울을 지나는 동안 황량한 들판에서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꺾이지 아니하고 꼿꼿이 자라나 초록빛을 띠고 있는 보리에게 경외敬畏감이 느껴진다. 

 

들판에는 또다시 생기가 돋아나는 계절이 돌아왔다. 얼어붙었던 땅에 농부의 손길이 닿고 두엄을 뿌려주면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약속의 장소가 된다. 앞으로 얼마 있지 않아 많은 양의 봄비가 내려주면 논에 물을 가두고 모판을 다듬어 모내기를 하면 초록빛이 수놓아질 것이다. 또한 그 속에서는 개구리가 알을 낳아 자라면 올챙이가 되고 다시 개구리가 되는 자연의 순리가 이어질 것이다.  

 

봄볕이 화사하게 내리쬐는 날, 농촌의 길가에 잠시 머물러 섰다. 밭갈이를 하는 노부부농부에게 물었다.

 

“밭에 지금 심는 나무는 무슨 나무입니까?”

“매실나무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막대기를 꽂아 놓은 것 같은데 매실이 언제쯤에나 열매를 맺겠느냐 물으니 내 손자가 성장하면 따 먹을 정도가 되겠지 한다. 긴 세월에 투자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이 참으로 여유롭다. 

 

유실수는 할아버지가 심고 그 아들이 잘 키워서 열매는 손자가 거둔다는 옛말이 새삼 틀리지 않는다. 나무를 심으면서 할아버지에게 눈치를 주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커진다. 60여 년간 농사만 지었다는 할머니는 행동이 굼뜬 할아버지를 못마땅해 하신다. 젊었을 적에 할머니에게 큰 소리를 쩌렁쩌렁 질렀을 터이건만 이제는 노쇠하여 할머니로부터 사랑스런 바가지 소리를 듣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한번 힐끗 쳐다본다.

 

다른 밭에서는 잡초를 뽑아내고 밭갈이를 하고 있다. 며칠 전에 내린 단비 덕분에 흙은 촉촉이 젖어 있고, 흙냄새는 언제 맡아도 좋다. 할아버지의 괭이질과 할머니의 호미질이 어우러지니 이보다 더 한가로운 정경이 있을까 싶다. 

 

따스한 햇빛을 벗 삼아 길가에 꽃을 심는 아주머니들의 바쁜 손길이 아름다워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꽃을 보며 봄의 향기를 만끽하라고 정성스레 화분을 옮기고 있다. 봄이 논밭갈이를 따라 함께 왔다. 길가에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까지도 맞이하고 있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wavekts@hanmail.net

 

작성 2023.02.28 11:11 수정 2023.02.2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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