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당항포해전의 경과와 승리 요인

이봉수

사천해전과 당포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함대는 1592년 6월 4일(이하 음력) 아침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이끌고 온 판옥선 25척과 합세했다. 아침 안개가 걷히자 거제도 쪽으로 도망간 적을 추격해 나서려는데, 거제에 사는 귀화인 김모(金毛) 등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도망간 적은 고성땅 당항포로 옮겨 정박하고 있다는 첩보를 알려주었다.

이순신 연합함대가 당항포 앞바다에 이르러 진해(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쪽을 바라보니 성 바깥 들판에 함안군수 유숭인이 기병 1,100명을 이끌고 적을 추격해 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곧장 사람을 보내어 당항포 입구의 지세에 대해 물어보았다. 유숭인의 함안 육군은 당항포구는 입구에서 약 10여 리가 되지만 안쪽이 넓어 배가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이순신은 우선 몇 척의 전선을 당항포 입구인 당목(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과 고성군 동해면을 잇는 동진교 다리 아래)으로 들여보내어 내만의 지리(地利)를 조사하고, 만약 적이 추격해 오면 후퇴하는 척하며 적을 유인해 오도록 명령했다. 잠시 후 이들 선발대가 신기전을 쏘며 본대에게 빨리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당항포 입구에 전선 4척을 복병선으로 배치한 후, 이순신 연합함대는 노를 재빠르게 저어 약 30리에 이르는 당항만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내만의 지형이 좁지 않아 해전을 할 만한 곳으로 보였다. 조선수군은 가지런하게 줄을 지어 소소강(고성군 마암면 삼락리) 서쪽까지 진입했다. 그곳에는 검은 칠을 한 왜선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대장선으로 보이는 제일 큰 배는 3층 누각이 있고, 누각 앞에 햇볕을 가리는 푸른 일산을 세웠으며, 누각 아래 검은 휘장에는 흰 꽃무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때 왜 대선 4척이 포구 안쪽에서 나오는데 검은 깃발에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花經)이라는 흰 글자가 쓰여 있었다. 조선수군의 위세를 본 왜군은 조총을 싸락눈과 우박처럼 쏘아댔다.

사진=당항포해전 기념관

 


조선수군의 판옥선들이 왜적을 포위하자 거북선이 적진으로 돌격하여 천자와 지자총통을 쏘며 적 대선을 격파했다. 이어서 여러 판옥선이 번갈아 적진으로 드나들며 총통과 활을 쏘며 한참 동안 전투를 벌였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전략적 계산을 했다. 좁은 소소포에 갇힌 적이 전세가 불리해지면 배를 버리고 상륙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적을 바다에서 완전히 섬멸하기 위하여 포위망 한쪽을 풀어 적도들이 바다 가운데로 나올 수 있게 했다.
 

수로가 개방되자 적의 대장선인 층각선이 빠져나오는데, 다른 적선들은 날개처럼 좌우로 벌려 대장선을 호위하며 당항포(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쪽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조선수군은 이들을 사면에서 포위하여 협공을 가하고, 거북선이 층각선 밑으로 달려들어 총통을 위로 치켜세워 발사하여 격파해 버렸다. 여러 판옥선들은 불화살을 쏘아 대장선의 비단 장막과 돛을 불태웠다. 층각 위에 있던 왜장은 불길 속에서 화살에 맞고 떨어졌다.

이때 다른 왜선 4척이 돛을 달고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순신과 이억기 휘하의 여러 장수들이 임무를 분담하여 이들을 다시 포위 공격했다. 침몰하는 배에서 뛰어내린 적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북쪽 산기슭으로 도망쳤다. 이들을 추격한 조선수군은 적의 머리 43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날 전투에서 이순신 연합함대는 적선 26척 중 25척을 격파했다. 왜군 패잔병들이 육지로 올라가 조선의 피난민들을 괴롭힐 것을 염려한 이순신 장군은 적선 한 척은 타고 도망갈 수 있게 남겨 두었다. 날이 저물자 이순신 연합함대는 당항포 입구로 나와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

다음 날인 6월 6일 새벽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당항포 입구에 매복해 있다가, 남겨둔 배 한 척을 타고 나오는 적들 마저도 모두 섬멸해버렸다. 100여 명이 탄 적선을 향하여 조선수군은 지자총통, 현자총통, 장편전, 철환, 질려포, 대발화 등을 쏘며 쇠갈고리의 일종인 요구금으로 적선을 끌어내어 넓은 바다에서 섬멸했다. 이들 중에는 24~5세 정도 되어 보이는 용모가 준수한 적장이 있었는데, 화살을 10여 대 맞은 후에야 크게 울부짖으며 바다로 떨어졌다. 

이날 오전 8시경 방답첨사 이순신이 적을 완전히 격멸한 후, 경상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 등이 뒤쫓아 와서 물에 떠다니는 적 시신의 목을 50여 급 베었다. 이들은 전투보다는 전공 보고에만 눈이 먼 행위를 당항포해전에서도 서슴지 않았다. 
 

이날 마지막으로 격멸한 왜선에서 왜인 3,040여 명이 혈서로 서명한 분군기(分軍記)와 함께 갑옷, 투구, 창, 칼, 총통, 말안장 등을 노획하여 조정에 올려보냈다. 분군기는 병사를 나누어서 이름을 기록한 문서다. 당항포해전에서 무찌른 적의 깃발은 흑색이었다. 이전에 옥포해전 때는 적색이었고, 사천해전 때는 백색이었으며 당포해전 때는 황색이었다. 이는 소속 부대를 분간하기 위한 것으로 이순신 장군은 평가했다. 

당항포해전은 적이 있는 곳을 미리 파악하고, 당항만 내부의 지세를 확인한 후 작전 계획을 수립한 것이 가장 큰 승리 요인이다. 당포 앞바다에서 강탁으로부터 적이 거제도로 갔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착량(통영시 미수동 통영대교 아래)에서는 김모로부터 적은 당항포로 갔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순신 장군은 두 개의 첩보를 교차 검증한 후 적이 당항포에 있다는 정보를 생산해냈다. 이어서 지역 상황을 잘 아는 함안 육군으로부터 당항포는 입구가 좁지만 안쪽은 넓어 해전이 가능함을 알아냈다.

본대가 당항만으로 진입하기 전에 척후선 선발대를 파견하여 사전 정찰을 실시한 것과, 당항만 입구인 당목 근처에 복병선을 배치하여 후방에서 나타날 적을 대비한 것도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술이다. 지세가 좁은 소소강 입구에서 포위 공격을 펼치다가 포위망을 일부 풀어 적을 당항포 앞의 넓은 바다로 유인 섬멸한 것도 큰 승리 요인 중 하나이다. 피난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남겨둔 한 척의 적선을 당항만 입구에 매복해 있던 조선수군이 마지막으로 격멸하여 당항포 승첩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었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 
https://yisoonsin.modoo.at

 

작성 2023.03.15 08:17 수정 2023.03.1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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