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산 법흥사
주천강의 물이 차가워지면 법흥사적멸보궁이 생각난다. 바위를 병풍처럼 두른 치악산 동쪽 사자산을 오르면서 나는 내 모세혈관 속을 흐르는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바람은 강원도의 산맥을 치달아 지나오면서 사자산에 이르러 비로소 몸짓을 멈추고 만다. 사자산 바람은 그대로 고요가 된다. 나는 고요와 한 몸이 되고 싶어 마음 안으로 낙서를 시작했다.
‘고요의 맹목을 보다’
달빛의 속살처럼 관능의 세계 위에서 바람과 고요는 혼재했다. 나는 이 위태롭고 고적한 풍경을 맹목적 고요라고 쓰고 나니 고요 속에선 맹목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맹목을 빼고 고요만 쓰고 나니 고요도 맹목도 달아나고 텅 빈 자리만 남았다. 내게 언어는 존재의 집이 아니라 존재의 거추장스런 집이다. 언어는 한바탕 시시껄껄한 농담이며 하찮은 욕망의 분신인지 모른다.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의 추상은 늘 이렇게 배신을 한다. 나는 배신의 언어를 묻으러 적멸보궁으로 올라갔다.
도대체 적멸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언어에 들어와 있는 적멸이란 진정 인간의 것일까. 글자 하나 차이로 나뉜 적막과 적멸 사이에서 ‘멸’이 나를 차갑게 붙잡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쓰다가 버리고 버릇없이 읽으면서 아는 체한 적멸에 대해 문득 주체하지 못할 고독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연히 없어져 버린 상태, 번뇌의 경지를 벗어나 생사의 괴로움을 끊음, 죽음, 입적, 열반이라고 사전에서 일러주는 것만으로는 나는 그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어 밀려오는 고독을 뒤집어쓰고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애초에 적멸은 나의 언어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세치 혀에 놀아난 적멸로 내 영혼의 밑거름을 만들려는 어리석음을 반성하며 적멸보궁의 소나무 숲길을 걸어 올라갔다.
나는 언어를 완성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나의 언어는 때때로 해롭다. 나는 언어로 천국을 만들고 언어로 지옥을 만들었다. 내가 언어에 대해 말할 때의 언어는 결핍만 있고 완성이 없었다. 부처나 예수나 사람이나 동물에게 언어를 들이댈 때 나는 나의 언어가 그곳에 도달하지 못해 안달하며 어리석음만을 내뱉고 쓸 뿐이었다. 언어의 재료들은 생각의 거처에서 알사탕처럼 만들어져 나올 뿐이었다. 그래서 나의 언어는 해롭다. 생각은 더 해롭다. 나는 언어와 생각사이를 가로지르는 위험한 곡예를 하며 아직도 적멸을 머리에 이고 끙끙거리며 걷고 있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나의 어리석음을 씻어 주는 듯 했다. 나의 언어는 법흥사 적멸보궁 가는 길에서 부셔지고 있었고 나는 부서진 언어의 시체를 안고 적멸보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643년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지장율사는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귀국했다.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에 사리를 봉안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자산 법흥사를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문수보살도 지장율사도 그리고 나도 적멸의 보궁 안에서 일체유심조가 아닐까. 그 위대한 일체유심조의 에너지로 나의 해로운 언어와 해로운 생각을 해체하고 야멸찬 언어를 치유해야 한다고 혼자 중얼거리며 걸었다. 그러나 나는 죄의식으로 숭고해 지는 인간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 아, 나는 벌써 강을 건너 왔는데 마음은 아직도 배를 타고 있었다. 나의 아상은 노끈보다 질기다. 이럴 땐 부처의 말씀도 소용이 없다. 빌어먹을…….
비에 젖어드는 적멸보궁이 고즈넉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고요가 적멸보궁을 감싸고 사자산 아래 수행승처럼 앉아 있었다. 저녁 비는 무지한 나를 따돌리느라 추적추적 내리고 나는 적멸의 그림자라도 보려고 끼적끼적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나에게 ‘본다’라는 욕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 시공 속에 처해 있는 지금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욕망에 집착해 있었고 법흥사 적멸보궁에서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비는 이쪽으로 몰려와서 저쪽으로 몰려가며 나를 조롱했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므로 적멸을 몰라도 부처의 제자요 부처를 몰라도 부처의 제자다. 그런 나를 적멸보궁 안에 들여놓고 내가 나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적멸보궁 뒤편으로 가자 지장율사가 수행했다는 토굴이 바위 지붕을 덮고 적막 속에 있었다. 그 옆으로 이름 모를 꽃이 성글게 피어 비를 맞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꽃이 비를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가 꽃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언어라는 결핍이야말로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리는 수행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의 한계 안에서 겨우 언어 하나만 가지고 적멸을 말하려 하는 무지가 어쩌면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서 덜 삭은 결핍은 희망이고 무지는 희망의 재료다. 나는 부처의 자비처럼 정갈하고 엄숙한 언어 하나하나를 불러 모아 적멸의 한가운데로 다가가려 했다. 적어도 적멸보궁에서는 말이다.
부서진 언어의 시체를 묻고 적멸보궁을 내려오는 길, 나는 그만 머리를 깎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다. 소설가 최인호는 여전히 중이 되고 싶다고 했고 황석영도 젊은 날 중이 되려고 절에 들어갔다가 어머니에게 잡혀 나왔다고 하며 김훈은 중이 되지 못한 자신의 운명을 두고두고 저주했다고 하는데 아직 인간 안 된 나는 불경스럽게 중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어이없어 혼자 실없이 웃고 말았다. 중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사자산 바람이 어둠속으로 들어가 적멸이 되었는지 비는 그치고 나는 다시 바람의 고요에 대해 마음 안으로 낙서를 했다.
‘나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