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는 역사가 오래된 도시다. 삼천포와 사천군이 합쳐서 사천시로 되었지만 아직도 삼천포라는 지명은 그대로 있다. 근처에 남일대해수욕장이 있고 그림 같은 한려수도 구간에 신수도, 늑도, 초양도 등 아름다운 섬들이 펼쳐져 있다. 봄이 무르익는 삼천포항에 도착한 것은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나는 삼천포항의 횟집마다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아줌마들이 회 한 접시 하고 가라고 난리다.
어둠이 밀려오는 항구의 가로등 아래서 짠 갯내음을 맡으며 나그네는 이미 바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행은 자유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요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움의 대상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바다가 될 수도 있고 대자연이나 우주가 될 수도 있다. 아른거리는 포구의 물 그림자를 뒤로하고 뒷골목에 있는 ‘평화아구찜’ 집에 들러 아구 대창과 수육을 한 접시 시켜놓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별미인 대창은 맛은 좋지만 워낙 고단백한 것이라 몇 점 먹고 나면 젓가락이 잘 가지 않는 음식이다. 밤 깊은 삼천포에서 매립지 쪽의 바다가 보이는 곳에 여장을 풀었다. 먼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밤배들이 평화롭기만 하다.
아침 일찍 볼락 매운탕을 잘 하는 집에 들러 해장을 했다. 볼락은 경남의 도어라고 한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볼락의 진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식가들과 낚시꾼들은 볼락이 제일 맛있는 고기라고 한다. 구이나 매운탕을 해놓으면 감성돔이나 참돔을 능가한다. 매운탕을 기다리는 동안 밑반찬으로 나온 것도 대부분 바다에서 나온 것들이다. 톳 나물, 전어 밤 젓갈, 파래, 미역 무침...... 모두가 군침을 돌게 한다.
삼천포에서 남해도로 가려면 삼천포대교를 건너 모개도, 초양도, 늑도와 창선도를 거쳐서 가야 한다. 이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대상을 받은 길이다. 삼천포대교를 넘어서니 온 섬이 유채꽃으로 덮였다.
봄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는 노란 유채꽃 언덕마다 부풀어 터진 봄이 온몸으로 나뒹굴고 있다. 군데군데 야산에는 나무들에 물이 오르고 진달래 속살에 봄 햇살이 간지럼을 태우고 있다.
창선도의 상신리에서 산길을 타고 오르니 산 중턱의 저수지 옆에 운대암이라는 암자가 나온다. 남해도 용문사의 산내 암자로 천 년 역사를 간직한 절집을 최근에 복원해놓은 곳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남해 바다의 파도가 햇살에 부서져 은빛으로 빛난다.
창선도와 남해도 사이의 좁은 해협이 지족해협이다. 점심때가 되기 전에 지족으로 가서 전통방식의 어업을 하는 죽방렴을 구경할 요량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는 길에 바닷가의 푸른 마늘밭이 눈길을 끈다. 작년 늦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노지에서 견딘 마늘이 싱싱하게 자라 온 섬을 덮어버렸다. 창선에서 남해로 건너기 전에 창선대교 끝자락에 차를 세웠다.
카메라를 들고 다리 중간쯤으로 걸어가니 바로 아래에 V자 모양의 죽방렴이 쳐져 있다. 해협이라 물살이 세차게 흐르고 그 물살을 따라 움직이는 고기들이 이곳 죽방렴에 들어가면 우물통처럼 생긴 한 곳에 모여 꼼짝없이 잡히고 만다. 죽방렴은 일종의 정치망이다. 여기서 잡은 멸치가 엄청나게 비싸게 팔리는데 그것이 바로 죽방멸치다. 그물에 걸려 고생하다 죽은 고기보다 죽방렴에서 산 채로 잡은 고기가 훨씬 맛이 좋다고 한다.
창선대교 초입에 있는 자연산 죽방렴 고기 전문점에 들어가 매운탕을 하나 시켰다. 그런데 주문을 한 후 30분이 지나도 음식이 나오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주방장을 불러 물어보니 이렇게 느긋할 수가 있을까. “자연산 죽방 고기는 좀 오래 끓여야 맛이 납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라고 한다. 매운탕은 뼈가 우러나야 맛이 난다고 한다. 나처럼 먼 여정에 배고픈 나그네야 시장이 반찬인데 주인은 바쁠 것이 하나도 없다는 표정이다. 문명에 찌들고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이면 누구나 갖고 사는 조급증을 이곳 지족해협의 죽방 매운탕으로 치유해 보고자 말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음식이 나왔다. 아! 역시 이 맛이야!
다리를 건너 남해 본섬으로 넘어서니 마늘밭이 더욱 장관을 이루고 다가선다. 마늘 대가 자랄 대로 자라고 마늘종이 돋아나고 있다. 남해도는 섬이지만 산세가 대단하다. 높은 하늘 가운데 망운산이 있고 보리암이 있는 금산이 상주해수욕장 뒤에 병풍처럼 버티고 있다. 백두대간이 지리산에서 그 대미를 장식하고 잠시 노량 바다를 건너 이곳 남해도에서 용트림을 한 것일까. 지세가 대단해서 그런지 남해도에는 많은 인물이 나고 사람들은 마늘처럼 억센 생활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따뜻한 남쪽나라 섬이기에 유자와 치자, 비자가 많이 나므로 ‘남해 삼자’라는 말이 있다.
지족에서 남해읍을 지나 노량으로 향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노량해전의 현장이다. 가는 길에 이동면 차면리에 있는 이락사에 들러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관음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밤새 왜군과 일전을 벌이면서 아침나절에 왜군이 쏜 조총에 맞아 운명하신 민족의 영웅이 잠든 곳이다. 장군이 가신지 400년이 지났지만 이락사 끝에 있는 첨망대에 오르면 조선 수군들의 함성과 포성이 들리는 듯하다. 멀리 광양만 너머 순천왜성이 있었던 신성포가 보이고 그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광양제철소의 굴뚝들은 분주히 연기를 내뿜는다.
남해대교를 넘어 하동 땅 노량으로 나오는데 바닷가에서 파래를 말리는 풍경이 너무도 정겨워 차를 세우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삼천포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섬과 다리를 지나 다시 육지로 돌아 나온 이번 여행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길을 둘러본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