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고스에서의 하룻밤은 나를 빼고 모두에게는 이벤트로 가득했다. 9시에 잠자리에 들면서 나는 수면제 한 알을 먹었다. 전날 밤에 수도원에서 겨우 2시간 반밖에 못 잤기 때문이었고, 오늘 우리는 다시 긴 32km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몇 달 만에 제일 멋진 잠을 잤다. 그런데 다음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가 잠을 잔 층에서 어떤 몽유병 환자가 헛소리를 하고 이상한 귀신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여기저기 침대를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잠을 깬 사람들에게는 공포였다. 모두가 참으면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 진심을 보여 사태를 수습한 사람은 오시였다. 그가 녹음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나는 사실 이를 증거로 남겨두고 싶었다. 한밤중에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오시에게 무척 감사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거기 누워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올라프는 우리와 함께 아침에 12km를 더 걸었다. 나는 그의 뒤에 섰지만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를 놓친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부르고스에서 약 20km 떨어진 세 번째 마을인 호르닐로스 델 까미노에 접근할 때까지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 택시 하나가 마을로부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막아섰다. 그래 맞아, 올라프였다! 올프라는 오늘 독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나는 그와 이별의 포옹을 하며 무척 기뻐했다. 그는 항상 이런 천진한 짓을 하는 걸 즐겨했다. 오늘 아침에도 예정보다 10km를 더 갔던 것이다.
나는 첫 번째 마을인 타르다호스에서 잠깐 커피를 마시고 어제부터 아픈 종아리에 밴드를 다시 묶기 위해 멈췄다. 전화기를 체크해 보니 조지와 제이드가 몇 킬로미터 뒤에서 그녀의 여동생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후로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호주로부터 날아온 비보를 접하고는 다시 부르고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이드의 가장 친한 친구 가족 중의 한 명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들은 순례여행을 계속할지 아니면 호주로 돌아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내 마음속에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 위안을 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내심 그녀의 친한 친구가 제이드에게 스페인에 머물러 순례를 마치기를 지원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나는 결국 이런 멋진 친구들과 헤어져야 했고, 내 마음이 얼마나 황폐해졌는지 모른다. 지난 2주는 제이드와 죠지가 내게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순례길에 그대로 남았다고 해도 가야 할 길 위에서 그들은 더욱 힘들어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올라프가 택시를 타기 전에 그를 따라잡기 위해 나아갔다. 그래서 치아라, 프란체스코, 그리고 나에게 친절하게도 밴드와 무릎보호대를 준 하르트무트와 카페에서 헤어졌다. 나는 이후 올라프를 만날 때까지 뭔가 상실감에 젖어 10km를 홀로 걸었다. 제이드와 죠지가 떠나자 나는 삶의 인연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다시 깨닫게 되었다.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해서 너무나 슬펐다.
호르닐로스 델 까미노에서 다시 하르트무트, 치아라, 프란체스코를 만났다. 하르트무트가 우리 모두에게 시원한 맥주를 사주었다. 프란체스코는 말린 무화과 한 봉지를 가져왔고, 나는 뮤즐리 시리얼 한 접시를 내놓았다. 프란체스코와 치아라는 남녀커플로 내가 론체스발레스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만났었다. 우리는 두 개의 벙크 베드를 칸막이로 하고 방을 함께 사용했었다. 그들은 이태리에서 왔다. 나의 이태리어 실력이 녹슬었지만 그들은 나와 잘 어울렸다.
우리는 까미노 순례길에서 자주 마주쳤으며 그들을 보면 항상 반가웠다. 그런데 왠지 그녀가 남자에 비해 너무 젊어 보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난 밤 올라프와의 작별 만찬에서 그들이 아버지와 딸 사이이란 것을 알았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나의 명민하지 못한 사회성 부족이 많이 느껴져 아주 놀랐다.
오늘 내가 호르닐로스까지 걸어왔던 20km는 나의 무릎과 정강이, 그리고 관절이 아픈 것을 감안해도 어떤 의미에서는 비교적 쉽고 견딜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15km는 끝없는 지옥이었다. 약 10km 정도 남았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순례길 베테랑인 스페인 사람 안토니오는 늦게야 우리들이 우회로를 둘러 왔기 때문에 아직도 15km가 더 남았다고 했다. 나의 정강이 통증은 괴로웠고 걷는 속도는 아주 느려졌다. 혼타나스까지 가는데 말이라도 건넬 수 있는 숙소가 하나도 없어 나는 마음을 다른 생각으로 집중하며 이를 악물었다.
나는 언젠가 하르트무트가 이야기한 것을 생각해 봤다. 그는 어떤 사람이 순례를 하면서 돌을 운반하는 관습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것은 세인트 장 피에드 포르트로부터 550km 지점에 있는 철십자가에다 어떤 인생의 짐이나 죄 또는 문제점을 갖다 버리는 것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이것을 한번 해보면 어떠냐고 제안했었다.
그날 늦게 나는 근사한 돌덩이 하나를 보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내가 돌덩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비록 매끄럽지만 돌멩이 보다는 상당히 컸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쪽 모서리 쪽에 두 개의 덩어리가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완벽하게 생기지 못한 것이 오히려 더 나를 기쁘게 했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단짝이었던 데이비드에 대해 줄곧 이야기했다. 그는 내게 여러 측면에서 영감을 주었다. 완벽한 음악적 기교는 물론이고 깊은 사유와 엉뚱한 유머도 거기에 한몫을 했다. 그가 올해 초부터 우리와 함께 연주할 수 없어 나는 깊은 절망에 빠졌었다. 그 이후로 그는 피부경화증 치료를 위해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스코티시 챔버 오케스트라를 위해서도 큰 불행이며 나에게도 너무 크고 깊은 상처였다. 그의 부재가 일시적이기를 빌었다. 나는 이 돌을 그를 위해 운반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늦게 하르트무트에게 이 돌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재미있어하면서 나 자신을 위해 이런 결정을 했는지 물었다. 나는 데이비드를 위해 돌을 갖고 간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정중하게 혹시 그것은 나 자신이 떨치고 싶은 부담을 구체화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내게 순례길의 하루 행군을 데이비드를 위해 바치는 것을 즐기라고 했다. 그는 또한 내가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잘 이해했다. 나는 그의 생각에 감사했고 그 헌신의 정신을 깊이 생각했다. 그 돌이 나 자신을 대신할 것으로 여기며 사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남을 위해 생각하는 것을 그가 꿰뚫어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것은 가끔 내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나에게 좀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남보다는 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면 나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먼저 많은 일들을 한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때 보고 싶은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는 대신 홀로 요가나 금식을 하기 위해 외딴 곳에 예약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비록 자선기금모금은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5주간의 고든을 생각하는 여행 중이 아니던가.
내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앞으로 혼타나스까지 5km가 남았다는 간판이 보였다. 맙소사! 아직 갈 길이 저리도 멀단 말인가. 정강이는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통증은 주기적으로 오는 것이라 괜찮았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거기 또 무자비한 간판이 아직 2km가 더 남았다고 하니 나는 더욱 절망했다. 지옥이었다.
생각 속을 헤맬 때 혼타나스 마을이 갑자기 나타났다. 마을을 보는 순간 내가 그렇게 안도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첫 잔의 맥주는 하르트무트가 샀다. 그는 좀 일찍 도착하여 몇 번의 격려 문자를 보냈었다. 따뜻한 마음으로 깊이 감사하며 마셨다.
[이수아]
줄리아드음대 졸업
스코틀랜드 국립교향악단 단원
스코키시체임버오케스트라 수석 첼리스트
스코틀랜드청소년오케스트라 상임고문
Mr. Mcfalls Cahmber 창립맴버
이메일 : sua@sual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