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삼천여 년 전 인간 ‘피참파’다. 아름다운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멕시코만 연안 베라꾸르즈 근처의 라 벤따에서 태어났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집들에서는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아이들은 해 지는 줄 모르고 노는 평화로운 곳이다. 너른 들에는 옥수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고 흰 파도를 밀어내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태양을 먹고 사는 우리 민족은 이 풍요로운 땅에서 하늘을 경외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간다.
아버지로부터 종종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먼 조상들은 바다처럼 큰 바이칼호수 근처에 살다가 차츰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눈이 내리고 얼음이 뒤덮인 지독하게 추운 알래스카를 걷고 또 걸었다. 조상들은 그렇게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와 태양이 내리쬐는 라 벤따에 정착했다고 한다. 검은 머리칼과 튀어나온 광대뼈와 검은 눈동자, 아름다운 황색의 피부는 태양과 잘 어울리는 우리 민족이 가진 자랑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듣고 아버지의 아버지는 그 아버지에게 들었을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고 재밌다. 물론 나도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내 아들에게 조상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우리는 가장 위대한 태양을 숭배했다. 달과 비, 천둥, 벼락, 폭풍도 경배했다. 용맹하고 날렵하며 힘이 센 재규어는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발톱, 아름다운 얼룩무늬는 가진 재규어는 우리 인간과 하나가 될 때 완벽한 힘이 나온다. 재규어는 강력한 영혼을 가진 우리의 친구이면서 수호신이기에 제사를 지낸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 대지가 타들어 가면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제사를 올리면 태양신은 마침내 비를 내려 주신다. 우리는 태양신이 내려주신 비를 맞으며 옥수수를 재배한다. 귀중한 옥수수는 태양신의 사랑이므로 우리는 이 귀중한 식량을 숭배하며 찬양한다.
나는 건강한 남자로 자라났다. 체구가 좀 커지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전을 짓는 일에 뽑혀 나갔다. 이 위대한 신전을 짓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일인지 아버지는 내게 끝없는 자부심을 심어 주셨다. 이 신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그 위의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지었다고 했는데 정확히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는 모른다. 아마 조상들의 피와 땀과 정성이 더해져 만든 시간의 신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신전을 위해 나의 피와 땀도 기꺼이 바쳤다. 나중에 나의 아들도 신전을 지으며 나처럼 조상들의 피와 땀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라 믿었다.
삼각형의 신전은 태양을 향해 지어졌다. 태양의 신성한 기운이 땅으로 내려와 우리의 안녕을 기원해 준다고 한다. 아름다운 조각들이 신전을 장식하고 비가 언제 올지 가뭄이 언제 들지 예언하는 천문대도 있으며 하루의 시간을 알려주는 해시계도 있다. 신전 아래에 비밀스러운 지하 통로가 나온다. 그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죽은 왕들을 모신 무덤이 있다. 그리고 공놀이도 할 수 있는 아주 큰 운동장도 있다. 이 운동장에서는 많은 사람이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공놀이는 목숨을 건 치명적인 의식이다. 이 경기에서 이기는 자는 태양신의 보호를 받는다. 일생을 두고 명예로운 일이다. 그 반대로 이 경기에서 지는 자는 신의 제물로 바쳐진다. 목숨을 걸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위험한 경기다.
나는 이 경기를 보면서 짜릿한 전율을 느끼곤 했다. 살아있는 환희를 느끼며 나도 이 경기에 꼭 나가서 우리 집안의 명예를 드높이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셨다. 경기에 나가면 부자지간의 연을 끊자고 협박하셨다. 아버지의 마음은 잘 알지만 나는 이 매혹적인 경기에 이미 푹 빠져 있었다. 목숨이야 언제 죽어도 죽을 것이 아닌가. 나는 반드시 이기겠지만 설혹 진다고 해도 그건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날이 왔다. 나는 그동안 피나는 노력을 다해 공놀이 경기를 빈틈없이 했다. 나도 이제 성인이 되었고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할 준비가 된 사람이다. 어머니는 경기에 나가는 나를 차마 보지 못하고 뒤돌아 우셨다. 그렇게 반대하던 아버지가 경기에 나가는 나를 위해 재규어 신께 기도 드리고 마지막에 태양신께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걸 알았다. 나의 결심을 꺾진 못하셨지만, 나를 위한 기도를 잊지 않으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아버지의 기도가 헛되지 않도록 경기에서 꼭 이기고 돌아오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무희들이 춤을 추었다. 잠자리 날개처럼 하늘거리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무희들의 춤이 땅의 신을 깨우고 재규어 신을 깨웠다. 땅의 신이 깨어나고 재규어 신이 깨어나 신전이 신성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나는 무희들의 춤을 감상하면서도 내심 긴장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호흡을 길게 내뿜고 긴장을 풀었다. 신전을 건설하면서 다져진 몸의 근육들이 움찔거리며 어서 경기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무희들의 춤사위가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와 싸울 상대 선수가 건너편에 있었지만 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3관왕에 빛나는 업적을 가진 완벽한 선수라고 사람들은 치켜세웠지만 나는 절대로 겁먹지 않았다.
무희들의 춤이 끝나고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관중석에서는 함성이 쏟아졌다. 사람들의 눈이 나와 상대 선수에게 집중되었다. 동그란 고무공이 내 무릎에 닿자 나는 무릎을 구부려 있는 힘을 다해 집어 들고 멀리 던졌다. 하늘로 올랐다가 땅으로 떨어진 공을 상대 선수가 순식간에 엎드려 팔꿈치로 쳤다. 몇 번의 공이 나와 상대 선수를 오가며 설전을 펼쳤다. 나는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있는 걸을 느꼈다.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 나에게 오는 공을 잡고 가서 상대방 골문에 넣으려고 했지 빼앗기고 말았다. 아직도 힘이 넘쳐나는 상대 선수는 보란 듯이 잽싸게 공을 두 팔에 넣고 내 골대로 진격해와 멋지게 공을 넣었다. 아, 내 골대로 들어간 그 공은 참으로 멋졌다. 나는 순간 눈을 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함성이 하늘로 퍼지고 있었다.
나는 태양신 앞에 섰다.
벌거숭이 제물이 된 나는 오히려 기뻤다.
태양신께 나를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