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대승사
‘동인’ 사라진 기억이다.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문학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어느 정거장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별이 흐르는 길에 융단을 깔던 시절의 문학은 ‘동인’과 함께 떠나보냈다. 그러나 사라진 기억의 저편은 어둡고 흉흉했다. 예술적 특권에 기생하거나 술독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입에 풀칠하기 바쁜 밥벌이에 정신이 나갔다고 그렇게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저마다 자기만큼 고통이란 놈에게 등짝을 내주는 것이 삶이지 않은가. 그래서 누구나 업으로 평등하지 않던가. 떠나온 길도 가야할 길도 그렇게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마지막 교정을 마친 원고를 덮던 그날 오후, 여든을 여러해 전에 넘긴 ‘동인’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사라진 기억의 저편에서 나는 한동안 멍했다.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문학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어느 정거장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별이 흐르는 길에 융단을 깔던 시절의 문학은 ‘동인’과 함께 떠나보냈다. 그러나 사라진 기억의 저편은 어둡고 흉흉했다. 문학이라는 욕망에게 매혹당할 수는 있지만 두 번은 아니다. 나는 한때의 소란을 딛고 얻은 고요의 세상에게서 나갈 생각이 없었다. 나에게 폭력이었던 ‘집단’의 힘으로부터 간신히 돌아와 홀로 즐거웠던 날들이었는데 전화를 받은 이런 날에는 바람구두를 신은 랭보가 생각난다. 랭보와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베를렌이 조용히 읊조렸던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처럼 사라진 기억속의 나의 문학은 가장 빛나는 죄악으로 남아 그냥 거기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게 다다.
이제 나는 나를 괴롭혀서 문학을 이루는 일을 그만 두었다. 밤, 술, 떼거리, 문인, 원고지, 커피……. 수없이 불렸던 이름들의 욕망은 지겨운 부조리다. 밤마다 문학을 꼬드겼던 욕망으로 나의 마음 지옥은 점점 좁아져 갔고 나의 문학은 안녕하지 않았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욕망은 결국 슬플 뿐이다. 슬퍼서 매혹적일 뿐이다. 나는 매혹적인 욕망과 나 사이의 오르가즘 끝에서 위험한 곡예를 그만둔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괴롭다는 생각이 괴로움이었다. 괴롭다는 생각이 나면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이제 문학은 내게 소백산 고양이다. 소백산처럼 명쾌하고 고양이처럼 단순하게 문학을 이루고 싶다. 전화를 받던 그날, 나는 단순하고 명쾌한 발걸음으로 문경을 향해 길을 떠났다.
대승, 침묵을 구하다
시간에 통달하기 위한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다. 그러나 나는 시간을 경멸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인생이 더 견디기 어렵다. 인생은 단지 허구 같은 진리 일뿐 대승사 극락전의 침묵보다 가볍다. 나는 켜켜이 쌓인 시간의 바닥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지만 끝내 그 바닥에 닿지 못하고 극락전 댓돌만 발로 비벼댔다. 천오백 년 전 처음 대승사 극락전을 지은 목공의 손이 내게 악수를 청하는 듯 여전히 순수한 그 무엇이 나를 이끌었다. 건물이 경지에 오른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지고함으로 빛나는 무위의 침묵이 대승사 극락전에 깃들어 있었다. 극락전 아래 명부전도 그랬다. 부처의 뒷모습처럼 하염없이 진실하다. 인간을 구하도록 운명 지어진 대승사의 겸손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나는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대승사에서 삼년동안 장좌불와를 하셨던 성철스님도 대승의 침묵을 통해 깨달음의 옷을 한 겹 입을 수 있지 않았을까. 밥 한 덩어리로 겨우 끼니를 때우며 쉼 없이 정진하여 깨달음에 다가갔다는 법전스님도 대승사는 남달리 유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깨달음에 대해 알 수가 없다. 나 같은 중생이 깨달음을 안다고 하면 그건 이미 깨달음이 아닐 것이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사셨던 성철스님이나 법전스님의 깨달음을 대승사에서 전해 듣는 지금 그것만으로도 나는 대승사 순례의 기쁨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문경에 들어서다.
네 개의 부처가 있는 사불산에 대승사가 있다. 직지사의 말사다. 928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경천호를 끼고 59번 국도를 만나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산북방향으로 계속 달리야 운달산 입구가 나온다. 다시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들어가다가 대승사 이정표가 나오는데 그 이정표를 보고 따라가면 대승사에 닿을 수 있다. 물론 그 길은 아름답기가 그지없는 길이다. 대승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해도 이 길을 달려보면 무엇인지 모를 해방감을 느낄 것이다. 그 해방감은 곧 행복으로 변하고 말 것인데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대승사 일주문에 들어서고 말지 모른다.
하늘에서 커다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석불이 떨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진평왕이 찾아와 예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위 옆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승사라고 하니 그때가 신라 진평왕 9년이었다. 문경에 처음으로 들어선 절이 대승사다.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짙은 경상도 사투리의 아낙네들과 빛바랜 중절모를 쓴 노인들이 몸에 익은 절을 올리고 간절한 소망 한보따리씩 부처님 앞에 풀어 놓고는 서둘러 빠져 나갔다. 마침 선방을 나오던 스님의 마른기침이 순례자들의 뒤를 따라가다가 대웅전 마당에 쌓인 햇살과 엉키고 말았다. 나는 순례자들의 순박함을 바라보았다. 나도 저들처럼 때론 부처님께 부담스런 구원을 요청했을 것이며 아상에 매달려 기복도 했을 것이다. 그런들 어떠랴. 저 순례자들이 기복의 선동자가 아니듯이 부처님도 진실의 수호자가 아니잖은가. 기복과 진실이 하나이고 나와 네가 하나이고 지옥과 천국이 하나인데 나는 대승사에서 분별하고 말았다. 아, 나의 지독한 에고는 죽지도 않는가보다. 누군가 말했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고 깨달음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