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용 (수필가/인문학자)
정을 떼려면 정부터 들어야 합니다. 정이 들고 나면 정을 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되고 맙니다.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정이란 정말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정 떼기는 사람에게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정을 뗀다는 것은 정말 죽음까지 맛보게 해 줄 것입니다. 죽다 살아나야 정 떼기가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섬의 비결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예술 속에 있고, 그 예술 중의 최고의 예술은 비극입니다. 비극은 슬픈 이야기로 일관하겠지만, 그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카타르시스가 이뤄집니다. 감정은 비극과 정화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정 떼기의 순간에는 눈물이 나겠지만, 그것을 참고 또 견뎌 내고 나면, 감정은 더욱 성숙해질 것입니다. 온갖 슬픔을 망각의 강물에 띄워 보낼 때 겨우 웃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감정이 나쁜 것이고 이성이 좋은 것이라고 배타적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감정을 부정해도 우리를 우뚝 세워 놓는 것은 결국 감정의 일입니다. 아무리 이성으로 생각하려 해도 생각처럼 안 되는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무너지고 뜻이 이뤄지지 않을 때, 자기를 붙잡아 주는 것은 결국 감정뿐입니다. 이런 감정을 홀대하면 안 됩니다.
어쩌면 감정이 이성보다 더욱 소중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감정이 이성보다 더 소중합니다! 이런 소리가 가능해야 결국에는 감정과 이성이 균형을 잡아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은 이성이 너무도 호감을 받고 있고 또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성의 훈련 속에서 자라날 뿐입니다. 좋은 학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도 이성을 강화시키는 훈련의 연장 속에서만 발견될 뿐입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우는 애들에겐 선물을 안 준대!’ 이런 노래가 연말이면 당연하단 듯이 세상 속에 울려 퍼지기도 합니다. ‘남자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 ‘사나이는 우는 게 아니야!’ 뭐 이런 소리가 세상 속 지혜의 말처럼 군림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이성 때문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감정을 홀대한 결과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감정을 챙겨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인문학을 공부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중세가 끝나갈 무렵, 근대인들은 ‘중세의 4대 학문’이라는 말을 유행시켰습니다. 이것을 나는 ‘철법의신’이라고 줄여서 외우고 다닙니다. 철학, 법학, 의식, 신학이 그것입니다. 근대 르네상스인들은 신학을 선두에 내세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신학은 4등으로 미뤄 두었을 뿐, 네 번째로 그 학문을 챙겨 두었습니다. 반드시 공부해야 할 것으로 높이 평가해 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학은 반드시! 꼭!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첫 번째인 철학은 인정해야 할 학문입니다. 근대를 열고 이끈 최고의 학문이 철학입니다.
이제 우리 민족도 바로 이 학문 앞에 진지하게 다가서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려면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철학으로 번역된 라틴어 ‘필로소피아’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이지만, 그 말의 순서를 보면 사랑이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로스’가 ‘소피아’를 앞서고 있다는 얘깁니다. 사랑 실천이 우선입니다.
사랑해야 지식도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을 외쳐 대도 사람들은 사랑을 침묵의 대상쯤으로 삼을 뿐입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달랐습니다. 그는 용감하게도 《유혹자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책을 집필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약혼은 하지 않았어도 연인을 가진 사람이 많고, 약혼은 했지만 연인은 없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이런 말이 선구자의 말입니다. 사랑 한 번 제대로 해 보려는 철학자의 의도와 용기가 읽히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