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의 백두산 기행]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봉수

서파에서 바라본 백두산천지
북파에서 바라본 백두산천지

 

백두산은 나에게 과연 무엇일까.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다. 단군으로부터 물려받은 백두산이 무엇 때문에 반 이상 중국령이 되었을까. 가서 내 눈과 발로 확인하고픈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그 꿈이 실현되어 인천에서 연길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일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큰 기쁨이고 설렘이다. 잠시 세상사 따위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하자 큰 해방감에 젖어들었다.

연길에 도착하니 6월인데도 한여름 더위다. 여행은 길을 잃고부터 시작된다고 했지만 이곳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는 길을 잃을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곳곳에 한글 간판이 즐비하고 비록 간자체이긴 하지만 중국 글자도 대충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조선족 가이드의 안내로 연길을 관통하는 부르하통강을 건너 버스는 두만강변의 도문으로 향했다. 부르하통강은 용정에서 흘러나오는 해란강과 합류하여 두만강으로 흘러간다.​

도문시는 한때 북중 접경 무역이 성행했고 인구가 1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어 급격히 외부로 빠져나가 지금은 1만 4천 명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관광객들을 태우고 두만강을 오르내리던 유람선도 발이 묶였다. 두만강 물살이 제법 세차게 흐르는 것으로 보아 최근 백두산 자락에 비가 좀 온 것으로 보인다.

중국 도문에서 바라본 북한 남양시

 

강 건너 지척에 보이는 곳이 북한의 함경북도 남양시다. 다락밭을 개간한 때문인지 산은 헐벗은 민둥산이다. 인공기와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가 육안으로 보이는데 음침한 건물 하나는 여자 죄수들을 수감하는 감옥이라고 한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 있을까. 애잔한 눈빛으로 북한 땅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나의 심사는 편치 않았다.

강변에 있는 광장에서 한족인지 조선족인지 모를 한 무리의 중년 남녀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과 춤이 마치 성형수술을 한 듯 가식적이고 획일적인 사회주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도문에서 출발해 숙소가 있는 연길로 돌아오는데 끝없는 옥수수밭에는 땅거미가 내리면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연길의 밤거리 풍경은 서울 못지않게 흥청댄다. 저녁식사를 하러 양꼬치 전문 식당으로 들어섰다. 중국은 정말 시끄러운 곳이다. 주변에 누가 있건 말건 고래고래 소리치며 전화를 하는 것은 예사다. 식당에서도 담배를 피우라고 재떨이까지 내주는 친절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 리필이라는 양꼬치를 먹으며 마늘을 조금 달라고 했더니 통마늘을 그대로 내준다. 손으로 마늘을 까서 양꼬치 안주에 독한 술을 마시면서 친구들과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틀째 되는 날 아침 5시에 일어나 간편한 도시락을 챙겨서 남들보다 먼저 민족의 영산을 보겠다고 길을 나섰다. 연길에서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진까지 가는데 3시간 반이 걸렸다. 중간에 용정을 지나면서 심사가 조금 복잡해졌다. 용정은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나라의 독립을 꿈꾸었던 윤동주가 태어난 곳이다. 해란강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들이 항일 투쟁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은 발해 땅이요 고구려 땅이 아니었던가.

어느덧 저 멀리 백두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6월 염천에 백두산은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신비한 자태를 드러냈다. 광활한 백두산 자락으로 접어들자 주변엔 온통 자작나무 군락이다. 추운 지방에서만 자라는 자작나무는 하얀 껍질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미인나무로 불린다. 화목으로 불을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나고, 약효가 좋다는 차가버섯이 자작나무에서 나온다.

백두산 서쪽 언덕인 서파를 오르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작은 셔틀버스로 갈아탔다. 운전기사는 곡예운전을 하며 구불구불한 산길을 천연덕스럽게 내달렸다. 안전벨트는 했지만 오금이 저렸다. 차창을 통해 보이는 활화산의 웅장한 자태는 녹다 남은 눈과 어우러져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게 했다. 

비교적 낮은 산록에 있는 자작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가문비나무가 드문드문 나타났다. 조금 더 올라가니 박달나무 군락지다. '배달'의 어원이 '박달'이다. 박달나무는 우리 배달겨레의 나무로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는 신성한 나무다. 조금 더 높은 고도로 접어드니 그토록 보고 싶었던 백두산의 야생화 만병초 군락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나무가 자라기 힘든 고산지대에 납작 엎드려 핀 만병초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꽃을 피우는 우리 민족의 심성과 너무나 닮았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고 했던가. 만병초 군락지 주변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형형색색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꽃을 피우지 않으면 멸종할 수도 있다는 절박함 때문일까. 야생화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꽃을 피우기 위하여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제각각의 주파수로 우주와 교신하고 있었다. 저리도 앙증맞고 아름다운 작은 꽃들은 그냥 지나치는 사람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으리라. 백두산 야생화는 관심을 갖고 관찰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자연의 위대한 선물이다.

백두산 서파로 오르는 길
백두산 북파 등정을 마치고

 

셔틀버스 종착지에 내리니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계단을 타고 서파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간간이 한국인들이 보이지만 대부분 중국 사람들이다. 우리 민족의 영산이 중국인들의 인해전술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길에서 늙은 할아버지들이 사람을 태운 가마를 매고 힘겹게 오르는 것을 보았다. 저토록 치열하게 사는 늙은 가마꾼 옆에서 희희낙락 셀카를 찍어대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백두산에도 삶의 이중구조가 공존하고 있다. 서파까지 1,4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는데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소리만 늙은 가마꾼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가마꾼

 

드디어 서파 언덕에 섰다. 청명한 하늘 아래 꿈에 그리던 천지가 나타났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백두산과 교합하여 코발트색 천지를 만들어냈다. 장쾌한 풍경에 압도되어 탄성을 지르며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손을 모아 천지를 향해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은 1년에 65일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삼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언제 안갯속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천지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우리는 바쁘게 셔터를 눌러댔다. 

배고픔도 잊은 채 천지의 풍광에 빠져 있다가 오후 2시쯤 하산하여 비빔밥으로 점심 요기를 했다. 오후에는 금강협곡 트레킹에 나섰다. 이곳은 생태보호구역으로 협곡을 따라 걷다 보면 기암괴석들과 원시림을 만날 수 있다. 곰과 여우 등 야생동물도 가끔 출몰하는 곳이다.

트레킹을 끝낸 우리는 객기를 부리며 젊은 시절로 돌아갔다. 금강협곡의 급류를 타고 떠내려가는 백하계류(白河溪流) 래프팅에 도전했다. 다들 고교 동창들이니 그 옛날로 돌아갔다. 백두산에서 떠내려가다가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를 지나 동해로 빠져나가도 좋다는 결기가 발동했다. 마치 미꾸라지라도 잡으러 가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방수복으로 갈아입고 용감하게 협곡 래프팅에 나섰다. 출발하자마자 보트가 작은 폭포로 곤두박질쳐서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떠올랐다. 옷은 이미 팬티까지 물에 젖어버렸다.

 

금강협곡 레프팅에 나서다
금강협곡 급류를 타다

 

10분쯤 떠내려가니 요령이 생겼다. 2인 1조인데 한 명은 노를 잡아 방향을 틀고, 다른 한 명은 바가지로 물을 퍼내기로 했다. 중간에 물살이 약한 곳에 이르자 내 파트너는 목청껏 노래를 불러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노래는 강물을 타고 협곡에 메아리쳤다. 해병대 군가도 장난삼아 불러대면서 우리는 원시림 속의 급류를 타고 떠내려갔다.

저녁에 이도백하진에 있는 진달래반점에서 식사를 하는데 백두산에서 채취한 취나물 향이 식탁을 압도했다. 목이버섯도 백두산 자락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한다. 한국식 요리에 술과 죽마고우들의 정담이 왁자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저녁에 호텔 방에서 2차를 한다고 밤잠을 설친 주당들 중에 위가 탈이 나서 고생한 친구도 있었다. 

삼 일째 되는 날은 토요일이라 중국 각지에서 2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올 것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더 일찍 서둘러 백두산 북파를 오르기로 했다. 셔틀버스 종점에 내리니 이미 정상 부근에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천지와 백두산이 어설픈 중국식 자본주의 앞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천지'라는 표지석 앞에는 먼저 사진을 찍겠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북파에서 보는 천지는 전날 서파에서 봤던 천지와는 조금 달랐지만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칼데라호의 비췻빛 물결은 사바세계에서 달고 온 찌든 때를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오후에 용정시를 들렀다. 일송정 푸른 솔이라는 그 옛날 그 소나무는 없었다. 용정(龍井)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우물가에는 용비경천비(龍飛驚天碑)가 우뚝 서 있는데, 사람들은 우물가에서 돈을 걸고 놀음을 한다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기개가 하늘을 찔렀던 그 옛날 독립투사들의 후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찌든 짝퉁 자본주의의 그늘이 우물 주변에 드리워져 있었다.

용정우물

 

용정의 우물을 뒤로하고 우리는 비룡폭포로 향했다. 중국인들은 장백폭포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백두폭포라고 하는 곳이다. 초입의 온천수가 보글보글 샘솟는 곳에서는 노지 온천수로 삶은 달걀을 팔고 있었다. 장쾌한 폭포에서 백두산의 기를 듬뿍 받고 내려와 저녁에는 북한식당에 들렀다. 음식은 맛나고 서비스하는 여성들의 미모도 출중했다. 자존심 때문인지 팁은 일체 받지 않고 꽃바구니를 사서 주면 그건 받았다. 식사 중간에 공연도 하는데, 우리도 마이크를 잡고 노래할 기회를 주었다. 체제와 이념이 남북으로 갈라놓았지만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이국에서 만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백두산 천지를 이틀 연속으로 선명하게 보았다. 확률적으로 1/32에 해당하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산한 다음날에는 백두산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청명한 천지도 좋지만 안개 자옥한 천지도 좋고 겨울에 눈 덮인 천지는 더욱 절경이라고 한다. 다음에 그런 풍경을 북한 쪽의 동파로 올라가서 보는 날이 꼭 오리라고 믿는다. 

 

[이봉수]

코스미안뉴스 논설주간

작성 2023.06.21 16:02 수정 2023.06.2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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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