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나그네

이순영

우리는 인생을 소모하기 위해 산다. 극단적인 판단 아니냐고 묻는다면 ‘대다수’라는 말을 넣으면 맞는 말이다. 생각해 보라.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먹는다. 마치 굶어 죽기 전처럼 먹는다. 미친 듯이 공부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 모른다는 절박감으로 공부한다. 죽도록 일한다. 일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일한다. 그렇다. 우리는 인생을 소비하는 생존기계다.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생존기계를 내 자유의지로 천천히 돌리거나 잠시 멈추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내 의식 어딘가에 숨어 있는 자유의지를 각성해서 꺼내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그네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모른다. 그런 사람은 생존기계의 안락함에 길들어 살다가 사용이 끝나면 폐기될 뿐이다. ‘인생 뭐 있나 안락하면 최고지’라는 사람에게 생존기계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나그네가 되어본 사람은 내 안의 자유의지가 각성하는 걸 경험할 수 있다. 나그네는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무기를 들고 내 안의 나를 만나러 가는 사람이다. 고독은 위대한 스승이며 외로움은 지혜의 샘물을 퍼 올리는 두레박이기 때문이다. 길은 길을 위해 존재한다. 나그네는 그 길을 걸으며 영혼이 흔들린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번쩍 깨우치게 하고 새롭게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힘을 발견한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되어보자.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보며 오늘은 어디에서 하룻밤 묵을까 걱정해 보자. 자신이 가진 풍요로움을 잠시 내려놓고 자발적 가난을 경험해 보자. 걸어보고 뛰어보고 비를 맞아보고 바람에 흔들려 보고 눈에 파묻혀 보면서 내 안의 나를 만나보자. 구름에 달이 가는지 달에 구름이 가는지 눈이 시리도록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삶이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 다 잊어보자. 오로지 자연과 나만 생각하는 떠돌이가 되어보자. 박목월처럼.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시는 문답시다. 박목월이 자기 고향 경주로 조지훈 시인을 초대했다. 두 시인은 마주 앉아 세상에 대해 사회에 대해 인생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지훈 시인은 박목월과 만났던 일이 내내 마음에 깊이 남았다. 그래서 박목월 시인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 속에 ‘완화삼’이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편지를 받은 박목월은 문학적 벗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그 그리움을 달래고 달래다가 답시를 지어 조지훈 시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시가 바로 ‘나그네’다. 나그네는 두 시인의 우정으로 탄생한 시다. 

 

박목월의 ‘나그네’를 두고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는데 한가하게 앉아 이런 자연시나 쓰고 있었다고 나무랄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고난이 깊어갈수록 마음은 자연을 향하게 되어 있는 법이 아니던가. 나그네가 되어 떠도는 심정이 낭만만 있었겠는가. 기댈 곳 없는 식민지 사람들은 죽창가도 부르고 떠돌이가 되기도 하고 다른 나라로 가서 독립운동도 하며 저마다 다 그렇게 고난의 고개를 넘고 있었을 것이다. 

 

나그네는 우리가 잊고 있던 ‘아련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달의 아려함, 구름의 아련함, 술 익는 마을의 아련함, 외줄기 길의 아련함, 강나루의 아련함, 밀밭 길의 아련함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저 가슴 깊이 숨어 있는 그리움과 맞닿아 있다. 아련함이 그리움으로 발현되어 인간의 본성을 자극한다. 그래서 ‘나그네’를 읽다 보면 그냥 가슴이 먹먹해진다. 마치 내 안에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어느샌가 불쑥 올라와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생존기계를 잠시 멈추고 어느 술 익는 마을의 주막집에 들러 막걸리 한잔하면서 인생에 취하고 자연에 취해 보고 싶다. 사는 게 별거인 양 아무리 용을 써도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다. 백만장자도 노숙자도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그저 오늘 하루 아무 탈 없이 살았으면 잘 산 것이다. 삼시세끼 밥 먹었으면 된다. 싫은 사람 억지로 안 만나서 행복한 하루다. 싫은 거 하지 않은 하루를 감사하며 나그네가 되어보아도 좋을 일이다.

 

구름에 달이 어떻게 가는지 오늘 밤에는 하늘 한번 올려다봐야겠다. 정말 구름에 달이 가는지 달에 구름이 가는지 아니면 구름에 별도 가는지 별에 구름이 가는지 밤하늘 한번 올려다보면서 홀로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박목월이 보았던 그 달과 그 구름을 나도 봐야겠다. 지치고 힘든 세상 그보다 더 위안이 될 수 있는 게 있겠는가. 지치고 힘든 세상을 향해 지껄이던 욕도 좀 멈추자. 그런 세상 말고 더 좋은 자연이라는 세상이 있다는 것도 한 번쯤 돌아보자. 나그네처럼 말이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07.13 11:10 수정 2023.07.1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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