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원한다면, 다이너마이트를 만나러 가야 한다
대학교에 다닐 때, 몇 번이고 과탑을 차지한 A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질문하기를 좋아하고, 생각이 깊은 친구였죠. 우연히 수업을 같이 들은 적이 몇 번 있었는데, A는 교수님을 당황하게 하는 질문을 자주 던지곤 했습니다. 솔직히, 대학 강의실에는 질문하는 학생도 거의 없기에, 어려운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손에 꼽는 일입니다. 질문하는 학생은 모두 강의실의 이단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A는 거의 매번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를테면,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어떤 내용에 있어 그 주장이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것을 파고들어, 그 가정에 윤리적인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논리적 오류가 있지는 않은지를 묻는 식이었습니다. 수업과 관련된 질문임은 확실해 보였지만, 통계나 과학으로 증명하기는 어려운 철학적 질문이라, 교수님이 답변하기 난감한 내용이었습니다. 친구는 수업마다 끈질기게 질문했지만, 교수님은 수업은 강의계획서에 따른 진도를 나가야 했기에, 또 다른 학생들도 그 질문에 심드렁했기에, 친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긴 A의 질문은 그만큼 근원적인, 철학적인 질문이었죠.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그 친구를 놓고, 왜 그렇게 나대는지 모르겠다며 헐뜯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A의 행동이 이해가 갔습니다.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저 역시 손에 꼽는 강의실의 이단아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A의 질문 수준이 더 높았으므로 대체 무슨 공부를 하기에 그토록 많은 질문을 할 수 있는 건지, 왜 그토록 깊게 의심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몇 해 전, 같이 얘기를 나누다 알게 됐습니다. A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철학계의 이단아, ‘니체’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이단아인, 저 역시 니체를 공부하고 싶어졌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든 철학자
19세기 독일(프로이센)의 철학자 니체에겐 많은 수식어가 붙습니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다이너마이트 철학자, 번개를 잉태한 철학자 등. 무슨 철학자가 이런 수식어를 달 수 있을까요. “신은 죽었다”라는 가장 유명한 니체의 말만 떠올려봐도 니체가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많은 반감을 샀을지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인이 평생 니체를 비난할 계기를 만들었으니 오죽할까요.
게다가 많은 사람이 오해하지만, 그가 ‘신’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종교적인 신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습니다. ‘신’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절대적인 이성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가령, 공공의 행복이나 도덕법칙을 말하는 유명한 철학은 물론, 국가나 공동체 중심의 사고도 전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게 니체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모든 도덕 철학에 대해 질문하며. 정말로 개인을 중심에 둔 철학은 아직 나온 적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세상이 뒤집힐 만한 말이었죠. 그는 어째서 다이너마이트가 되었던 걸까요?
니체가 살았던 당시 독일(프로이센)은 음악이나 문학이 뛰어났음은 물론이고 군사력도 뛰어나 전쟁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을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독일인의 콧대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죠. 한편, 사회적으로는 민족이 중요시되었고, 정치인들도 연설문에 국가나 공동체를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별 의심 없이 이를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죠. 니체는 그런 국가, 민족 중심 사고가 개인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눈길을 돌려 당시 유행하던 철학을 보면, 칸트의 철학이나 벤담의 공리주의 등이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 철학은 보편적인 인간상, 이성, 행복을 강조하는 철학이었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는 이 철학들은 개인을 얘기하고는 있지만, 그저 종교적인 신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여전히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하나의 감옥에 집어넣은 꼴이었죠.
그가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고독한 자여, 너는 사랑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며, 그 때문에 너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경멸을. ⸱⸱⸱ 형제여, 눈물로 간청하노니, 너의 고독 속으로 물러서라.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 하며 그리하여 파멸의 길을 가는 자를 사랑하라.”
니체는 모든 이가 따라야 할 가치나, 이상 같은 것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마치 그런 게 있는 것처럼 잘못 간주하고 있었죠. 그는 이제라도, 절대적인 도덕 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민족이나 가족 등의 집단을 중심에 두지 말고, 개인이 본능적으로 추구하고 싶은 걸 하도록 놔두고, 존중해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개인의 독립성을 바탕으로 인생을 후회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출판하며 이렇게 개인의 철학을 주장했을 때, 독일 지식인들은 니체를 문제아로 여기며 무시했습니다. 비판의 내용은 주로 내용이 문학적이기만 하고, 너무 급진적이라는 거였습니다. 이로 인해, 니체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고,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이렇게 포기할 사람은 아니었죠. 니체가 비판을 대하는 태도는 보통 사람과는 달랐는데, 그는 오히려 자신을 문제아, 다이너마이트로 칭하며 지금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미래에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에겐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중요했지, 남들이 원하는 일은 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니체는 자기만의 가치를 찾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무너진 탑 위에 새로운 집을 지어라
니체는 지금껏 주장된 철학이나 사고를 몽땅 무너뜨리는 것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무너진 철학 위에 그만의 독특한 개인주의 철학을 쌓았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건 집단이나 사회보다는 각 개인이 궁극적인 가치를 만들고, 강한 의지력을 발휘해, 그 가치를 열정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자는 거였습니다. 그는 이런 사람을 ‘위버멘쉬’이라고 칭하며 모두가 위버멘쉬로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서로에게 배 놔라 감 놔라 하지 않고, 각자 즐겁게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새로운 유형의 인간, 위버멘쉬로 변화하는 과정을 유명한 낙타-사자-아이의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1. 낙타의 단계
첫 번째는, 낙타의 단계입니다. 머릿속으로 무거운 짐을 싣고 사막을 걷는 낙타를 떠올려봅시다. 낙타는 온갖 고통을 인내하며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앞선 니체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낙타는 신이 살아있다고 여기고, 자기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서둘러 목적지로 달려갑니다. 자유롭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낙타는 인생을 마치 달리기 경주로 봅니다. 이들에게는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 누가 덜 고통스럽게 살았는가가 인생의 성적표입니다. 타인의 짐을 지고, 타인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 낙타의 눈에 삶은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것들로 가득하죠. 어쩌면 이 단계에서, 낙타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태도를 지닌 낙타는 평생 한숨만 쉬며 로또 당첨 같은 운을 믿고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니체의 말처럼 낙타의 마음속엔 어떤 꿈도 없고, 꿈을 잉태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너희는 아직 그러한 혼돈을 지니고 있다. 슬픈 일이로다! 사람이 더는 별을 잉태할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니.”
2. 사자의 단계
하지만 이렇게 삶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낙타의 삶은 너무 비관적입니다. 니체는 두 번째로 사자의 단계를 꺼내 놓습니다. 사자는 타인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사막의 주인이 되려는 단계입니다. 사자는 낙타로서 지니고 있던 짐들, 외부주도적인 습관, 성격, 가치관 등을 모두 내려놓고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려고 합니다. 마치 돈키호테가 된 듯, 자신을 가로막는 거인들과 맞서 저항하고, 무너뜨리죠. 사자의 단계에 놓인 사람들은 이를테면 그 친구처럼 교수님의 주장에 의심을 품고 정말 타당한지 질문합니다. 또한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남들이 결혼해라, 대기업을 가라 등 잔소리를 펼칠 때, 왜 그래야 하는지 묻고, 때로는 ‘아니오’라고 말할 용기를 냅니다.
물론 사자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유로워지기만 할 뿐,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 주변에도 사자의 단계에서 한없이 방황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남들의 기준에 맞춰 살고 싶지는 않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 인생의 성공을 돈으로 측정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내 성공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고민에 시달리는 친구 말입니다. 하지만 충분한 방황을 하고 나면, 꿈을 찾게 되는 시기는 옵니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이전보다는 더 나은 목표를 설정하게 되는 시기 말입니다.
3. 어린아이의 단계
니체가 우리에게 권하는 마지막 단계는 바로 어린아이의 단계입니다. 낙타가 삶을 고통으로 보고, 사자는 싸움으로 본 것과 달리 어린아이는 삶을 놀이로 인식합니다. 순진무구하고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며,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자기에게 스스로 역할을 부여합니다.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이전에는 없던 자신의 인간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 시기에 도달했다고 하여,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고통스러운 날도 있죠.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런 고통마저 긍정적으로 끌어안고,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고통을 통해, 자기 목표에 가까이 갈 수 있다면, 고통을 단지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재미를 찾아, 그 과정 자체를 즐겨 나갑니다. 그래서 비록 끝내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이번 생은 망했다고 외치는 대신, 똑같은 생을 한 번 더 살아도 좋겠다고 외칩니다.
“이 하루로 인하여 나는 난생처음으로 내가 살아온 전 생애에 만족하게 되었다. ⸱⸱⸱ 이 하루,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벌인 이 축제가 나를 깨우쳐 이 땅을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삶이었던가? 나 죽음을 향해 말하련다. ‘좋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나만의 틀을 나와 타인의 틀로 걸어가며
아마 A 역시 아이의 단계에 와 있던 것 같습니다. A는 고민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미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주변에서 전망이 안 좋다느니, 공부하기 어렵다느니 말을 해도 친구는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저는 A에게 응원하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A 덕분에 니체를 공부하게 되었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나만의 꿈, 이상을 좇는다는 게 위험하지는 않을까, 자칫 다른 사람을 이해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사람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타인의 틀에서 산다는 게 정말 의미 없는 것인지, 쓸모없는 일인지, 이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의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을 거라고 상상했습니다. 타인이 쌓아온 논리와 가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신의 가치를 좇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나만의 철학을 세우기보다, 오히려 수많은 타인의 틀 안으로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읽기 어렵고 힘들더라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온전히 이해해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는지, 놓치거나 소홀히 다룬 것은 없는지 다시금 확인해보는 일 말입니다.
어쩌면, 같은 의미에서 니체를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그렇게 타인의 틀로 걸어가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대로 된 니체 철학을 하려면, 그의 책을 읽고 태워버려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 스스로 길을 선택한 데 있어 니체도 반감을 표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더 좋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기존의 것을 모두 비판하고, 자신의 욕망을 마주 보라고, 문제적 개인이 되라고 말했으니까요. 제게 문제적 개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거였습니다. 대화하는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전체를 보는 눈을 키워, 대화하는 개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래야 어떤 변화든 더 의미 있을 테니까요.
참고한 책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2015. 책세상.
K People Focus 필진 아사달97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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