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여객선터미널에서 11시에 연화도로 출항해야 할 배가 30분 늦게 출항한단다. 아침에 걱정했던 대로 통영만 일대가 해무로 가득하여 여객선 운항에 지장이 많은 모양이다.
연화도를 경유해서 욕지까지 가는 욕지행 여객선은 여행객을 가득 싣고 11시 반이 되자 출항한다. 섬으로 떠나는 여정은 늘 뱃전에서의 설렘으로 시작한다. 연화도로 향하는 카페리의 갑판에서는 따가운 햇살이 부서지는 초여름 바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여름은 뭍에서도 그렇지만, 바다에서도 눈이 부시게 다가온다.
‘욕지(欲知) 두미(頭尾)하거든 문어(問於) 세존(世尊)하라.’ “처음과 끝을 알고자 하거든 세존께 물어보라.”
선문답 같은 이 글에 등장하는 한자어가 모두 통영 근해의 섬이나 포구의 이름이다. ‘욕지’와 ‘두미’, ‘세존’은 통영 앞바다의 섬 이름이고, ‘문어’ 역시 통영 앞바다의 섬 한산도의 포구 이름이다. 호수처럼 고요한 바다 위 징검다리 같은 포구와 섬 이름을 이어붙이니 불가의 선문답 같기도 하고, 한편의 시 같기도 한 문장이 완성된다.
갑판 위에서 갯내와 해풍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잔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해무 때문에 주위 섬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도 막걸리 한잔으로 위로받는다. 용초도, 비진도, 연대도, 연화도, 욕지도, 상노대도, 하노대도, 두미도, 추도, 사량도, 곤리도, 만지도, 학림도.
섬들은 물길 따라 흐르다가, 한순간 멈칫 서 있다. 그래서 ‘섬’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섬과 섬 사이에는 물이 흐른다. 배가 화살처럼 그 물을 가른다.
통영에서 1시간 걸려 도착한 연화도(蓮花島)는 섬 트레킹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동서로 3.5km, 남북으로 1.5km가량의 작은 섬이지만 해안 풍광이 수려해 통영 8경에 꼽을 정도다. 북쪽에서 볼 때 꽃잎 한 잎 한 잎이 겹으로 싸여 한 떨기 연꽃 같은 섬의 형상 때문에 연화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욕지도와 함께 연화도는 고등어 양식을 많이 하고 있다. 부둣가 간이 천막에는 고등어 양식 사료에 쓰이는 전갱이를 회로 떠서 팔고 있다. 전갱이는 고등어와 같이 지방이 많아 어획 후 선도가 급격히 저하되기 때문에 산지에서만 회로 먹을 수 있다. 자주 먹어본 고등어회보다 더 기름지고 찰지면서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지면서 싱싱한 바다 향이 몸에 밴다.
연화도와 우도를 잇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보도교가 작년에 개통되었다. 연화도-반하도-우도 3개 섬을 연결하는 총 길이 309m의 트러스트교는 통영 8경 중 으뜸인 연화도의 용머리 해안과 함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연화도 트레킹 코스는 본촌 마을 서쪽 끝의 산길에서 시작한다. 잘 정비된 계단을 따라 숲으로 접어들면 길이 제법 넓어져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나무계단을 20여분 쯤 걷다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섬주변의 양식장과 양쪽으로 자그마한 섬들이 한 폭의 그림을 그려놓은 듯하다. 그 풍경에 잠시 넋을 놓다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발 아래로 본촌마을 앞 포구와 우도 사이의 잔잔한 바다가 펼쳐진다. 해안선은 올록볼록하게 바다를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가 금새 꼬리를 감춘다.
해안 길은 그림이요, 시요, 감미로운 해조음이다. 파도소리와 산새소리가 번갈아 들려 귀가 즐겁고, 갯내음과 숲 내음이 어우러져 코가 상쾌하다. 나무가 우거진 숲을 걷다보면 땀 식혀주는 그늘이 고맙고, 바다가 보이는 길로 들어서면 시원한 바닷바람이 반갑다. 숲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봉우리 꼭대기의 벤치에 앉으면 연화도 남쪽 망망대해의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계속 이어지는 주능선의 오르막길을 따라 400m쯤 오르면 연화봉 정상(212.2m)에 서게 된다.
‘연화(蓮花)’라면 곧 연꽃이다. 연화도 그 이름에서 불교적 이상향을 의미하는 ‘연화장(蓮花藏) 세계’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이치다.
바위들이 쌓여 있는 연화봉 정상은 최고의 전망대다. 드디어 바다가 뻥 뚫리는 섬의 산정에 서면 그 시원한 풍광에 잠시 소스라치는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땀을 흘려 올라간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와 낭만이다.
섬 동쪽 끝의 ‘용머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용머리’란 이름이 붙은 연유는 분명하다. 섬에 딸린 바위들이 줄지어 늘어선 것이 영락없이 용이 자맥질을 하며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이다. 그걸 바라보는 연화봉은 아마도 용의 등쯤 되겠다. 용의 등에 올라서 섬이 통째로 대양을 향해 헤엄쳐 가는듯한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정상에서 시작된 지그재그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연화도사와 사명대사께서 수행한 토굴이 나온다. 토굴을 지나 시원한 바다 바람과 함께 능선을 따라 용머리로 가는 길은 환상적인 바다 조망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긴 비탈길이 끝나면 주능선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5층 석탑이 앞을 막는다. 산길은 계속 주능선을 타고 이어지는데 석탑 옆으로 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서면 보덕암이 나온다. 가파른 연화봉 남쪽 사면에 자리한 이 사찰은 네 바위의 절경을 정면으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장소다. 해안 절벽을 크게 돌아 다시 고도가 뚝 떨어진 뒤 도로와 다시 만난다. 하지만 산길은 곧바로 건너편의 봉우리로 올라선다. 길은 점차 험난해지며 바위지대로 올라선다. 경사도 급해지고 좁은 바위 구간의 암릉 지대도 있다. 양 옆으로 아찔한 절벽이 형성된 곳에는 계단과 철책이 설치되어 있다.
동두마을 부근의 네 개의 바위섬인 ‘네바위’를 포함한 이 해안 절벽 지대는 연화도 제일의 절경이다. 용머리와 연결된 남쪽 해안에 금강산 만물상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바위 군상이 펼쳐진다.
섬의 등을 타고 걷는 길은 줄곧 바위벼랑과 바다를 끼고 가는 최고의 코스다. 섬의 좁은 목에서 잠깐 시멘트 포장도로 내려섰다가 다시 깎아지른 해안벼랑을 끼고 가는 코스로 길은 이어진다. 이쪽의 해안벼랑은 삐죽삐죽 거대하게 솟은 바위들의 형상이 마치 죽순과도 같다 해서 ‘대바위’란 이름이 붙었다. 한발 한발 벼랑을 따라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점입가경이다. 아들딸바위, 망부석, 만물상. 이름처럼 기기묘묘한 형상의 거대한 해안바위들이 줄을 선다.
암릉지대를 지난 산길은 아찔한 절벽 사이로 설치한 출렁다리로 이어진다. 바다와 절벽이 어우러진 아찔한 조망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구름다리다. 긴 다리와 계단을 통과하면 118m봉 정상에 오른다. 이후 산길은 서서히 아래를 향하면서 이내 급경사로 변한다. 동두마을 직전의 도로까지 100m 고도를 지그재그 길로 내려선다. 연화도의 등뼈를 짚으며 걷다가 바닷가에 치솟은 협곡을 만난다. 그 사이로 푸른 바닷물이 넘나든다.
연화도에서 꼭 필요한 것은 ‘넉넉한 시간’이다. 연화도는 바삐 걷자면 서너 시간쯤 걸리지만, 그 멋진 섬을 그저 발끝만 보고 걷는다는 것은 양이 차지 않는다.
바다를 마주한 보덕암 암자 마당에서 얕은 기와담 너머의 바다를 오래 바라보고, 죽순처럼 치솟은 바위 벼랑 사이를 느린 걸음으로 지나고, 느릿느릿 가는 섬의 시간에 맞춰 연화도에 머물러야 비로소 몸이 아닌 ‘마음을 쉰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