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선소감]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처음 도전한 공모전이 제1회 코스미안 공모전이었습니다. 그후 3년 동안 글을 써왔지만 이번 공모전이 마지막 도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글쓰기 인생의 시작과 끝이 코스미안일줄 알았는데 코스미안상 수상으로 인해 다시 새로운 시작입니다.
3년 동안 바싹 가뭄이 마른 마음에도 봇물을 흘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쩌면 코스미안이라는 비를 기다렸나 봅니다. 이 단비를 시작으로 봇물처럼 쏟아질 글의 소리가 들려와 너무나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제5회 코스미안상 은상 -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나는 정말이지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하루 종일 성가시게 엉겨 붙는 생각들로부터, 지치지 않고 나의 평화를 뭉개버리는 감정들로부터,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의 근원인 내 자신으로부터. 그래서 나 자신을 잊으려 명상을 시작했다. 나를 잊고 '노바디'가 되려는 소망은 어쩌면 본능적이었다.
우리는 살아온 모든 순간의 집합체이다. 어떤 순간들은 미치도록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어떤 순간들은 벅차오르도록 흐뭇하고 만족스럽다. 그러나 이 모든 순간들은 어떤 짐처럼 우리를 짓누른다. 과거의 모든 실수와 악행, 아무도 모르는 은밀하고 해로운 사념들까지 모조리 그 자리에 있다. 피부에 스며든 타투처럼 그 어느 것도 지워지지 않는다.
일을 관두고 쓸모없는 인간, 잉여인간이 된 느낌에 한동안 괴로웠다. 글을 써서 자아실현을 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더는 이루고 싶은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며 그것도 나의 욕심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밤색으로 익지도 못한 채 푸르딩딩한 얼굴로 떨어져 지나가던 행인에게 밟혀 으깨진 도토리도 나처럼 자기 생의 쓸모없음을 한탄하고 있을까? 남들처럼 맛나는 묵이 되지 못함을 비통해하고 있을까? 무언가를 해내서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것 자체가 나의 자의식 과잉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뭐라도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괴롭힐 뿐이었다.
죽음에 대한 명상 뒤에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차분한 내가 보였다. 죽기 전까지 그 어느 누군가에게도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고 그대로 삶을 마감한다 해도 그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 어느 신도 나를 원망하고 책망하지 못하리라는 걸.. 나를 잊고 세상으로 녹아들어 가던 그 순간 느꼈다.
명상으로 어설프게나마 죽음을 경험한 나는 온몸의 때가 벗겨진 듯 홀가분하다. 세상에서 입은 때나 마찬가지인 에고를 벗고 나자 투명해진 몸은 두둥실 가뿐하게 떠오른다. 살랑이는 가벼운 바람에도 날아갈 정도로 산뜻한 존재가 된다. 나는 바람처럼 세상 만물에 스며든다. 세상 전부가 내가 된다.
자아를 벗고 세상 전부로 녹아들면 더 이상 자신을 과시하려는 자아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누구나 다 자아를 전시하려고 한다. 나는 끊임없이 존재의 가치를 확인받으려는 시도를 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들에게 지쳐있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할 때만 이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둔 나는 무익하게 스러지는 나의 자아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노을을 조금 더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죽음이 자유를 데려왔다.
"온갖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욕망과 아집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외부에 가득 차 있는 우주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죽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법정 스님이 하신 말씀이다. 불교는 우리에게 쥔 손을 펴서 내려놓으라고 가르친다. 붙잡아도 붙들어 둘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내려놓을 때 온 세상이 손에 들어온다는 걸 부처님은 이미 몇천 년 전에 깨달은 것이다.
나는 세상에 항복하기로 했다. 나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세상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세상은 몇 번이고 나를 배신할 테지만 가끔은 상상조차 못 한 아름다운 선물을 주기도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힘을 빼고 수면 밑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것과 같았다. 내 의도로 어쩌지 못하는 온갖 풍파에 휩쓸리며 고통받다가 조금만 밑으로 내려가자 늘 거기 있던 고요가 있었다. 출렁이는 불바다 같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한동안 '플로팅'이라는 것에 빠져 살았다. Floating은 엡솜 소금을 잔뜩 푼 욕조에 들어가 말 그대로 물에 둥둥 떠 있는 것이다. Sensory Deprivation Tank라고도 불리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물 위에 떠 있다 보면 모든 감각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기묘한 이야기에서 일레븐이 초능력을 쓰기 위해 물속에서 감각을 차단시키는 것을 보고 플로팅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플로팅은 모든 감각적 자극이 배제된 상태가 스트레스 관리에 좋다는 것과 엡솜 소금에 여러 건강상의 이점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수년 전부터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플로팅에도 잘하는 방법이 있다. 처음에는 힘을 빼도 몸이 물에 뜬다는 걸 믿고 릴렉스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플로팅을 잘못하면 건강상의 이익은커녕 손해만 있기 때문에 물에 전적으로 몸을 맡기고 힘을 풀어야 한다.
침대와 다르게 물 위에 누우면 금세 몸의 경계를 잊는다. 보통 플로팅 탱크는 성인 남성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처럼 사지를 활짝 펴도 될만한 크기다. 그렇게 완전한 어둠과 고요 속에 떠있다 보면 어느 순간 어디까지가 내 몸이고 어디서부터가 물인지 가늠할 수 없는 시점이 온다.
명상을 잘해도 그런 순간이 온다. 내 몸의 경계가 사라지고 무한대로 퍼져나가는 신비한 느낌.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고 나면 더 빨리 이 시점에 도달한다는 걸 발견했다. 나를 지우면 세상으로 녹아드는 게 더 쉬워지기 때문일까? 그리고 이 느낌은 대체 무엇일까?
윌리엄 블레이크는 순수의 전조(The Auguries of Innocence)라는 시에서 가장 작고 연약한 것들에조차 거대한 우주의 진리가 담겨있음을 말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보려면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순간 속에 영원을 담으라
나라는 하찮은 인간 안에도 그런 우주의 기묘한 진실이 살아 숨 쉬는 건 아닐까? 명상으로 편협한 자아를 잠재워야지만 느낄 수 있는 장엄한 진리 같은 것 말이다.
꽃잎이 흩어진 강물 위를 둥둥 떠가는 명상을 한다. 나는 이 강을 믿고 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리라고. 온 근육들이 말랑하게 풀어지며 조인 곳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충만한 행복과 축복 속에서 나는 확신을 얻는다. 이 여정의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게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지 모른다고.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게 얼마나 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지.
계획과 통제하려는 헛된 욕심일랑 내려놓고 거대한 우주의 물살에 몸을 맡겨야 한다. 모든 게 버거우면 눈을 감고 죽음을 떠올리며 조금 밑으로 잠수를 해보는 것도 좋다. 그 안에서는 흰색 무지개처럼 바닷속으로 꽂히는 햇살과 수면에 그림을 그리는 빗방울이 다 보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끝이 없는 영원의 바닷속으로 침잠할 것이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 오래 떠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19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생이란 불안이란 열차를 타고 절망이라는 터널을 지나서 죽음이라는 종착역의 이르는 실존이라고 했다. 어쩌면 나는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에 기대 불안과 절망을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죽음은 우리에게 불완전에 대해 상기시켜 준다. 죽음으로 인해 세상 그 무엇도 완전해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면 우리는 조금 더 미흡해지고 더더욱 행복해진다. 완벽함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다.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실패한 경험에서 오는 수치심에 입술을 씰룩거리지 않아도 된다. 실패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더 이상 목적지가 쓰여지지 않은 열차표를 쥐고 창밖을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된다. 열차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터널은 더 이상 어둡지 않다. 우리는 종착역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