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장산은 한 잔의 ‘단풍미인 쌀 막걸리’에 단풍이 내려앉고 온갖 천연염색의 빛깔을 연출해내고 있다. 이토록 기쁜 입맞춤을 그냥 보낼 수 없는 날에 낙엽은 안주가 되고 볼펜을 젓가락으로 삼으니 수첩은 밥상이 된다.
내장산 가을이 단풍 한 움큼 베어 무니 붉은 입술이 되었다. 승천하는 내장산 꽃물도 한 모금 마신다. 기다렸던 가을의 갈증을 풀어 주니 내장산은 어느새 가을에 젖어 있다.
멀다 멀다하며 부산에서 출발하여 차를 몰아 다다른 곳 내장산에는 한복단추처럼 가지런히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단풍이 심호흡을 하며 다른 산과 비교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부지런한 여름이 갖다 날랐던 더위를 먹어 맺은 붉은 약속. 그 뜨거웠던 여름날의 별들이 투신을 하여 붉은 가을을 출산하는 산고의 고통을 이겨내며 내장산 단풍이 불그레한 수줍음을 드러내 놓고 말았다. 가을과 잦은 이별을 했음에도 언제나 화려한 재회를 하는 날이면 또 다른 가을이 된다.
한 발짝 물러서 있던 수줍은 바람이 불어오면 스르르 떨어지는 낙엽이 기타 줄을 튕기고 가을에 익은 벼와 비슷한 보호색을 지닌 메뚜기가 폴짝폴짝 뛰면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가을의 연주회는 어느 계절보다 풍요롭다. 가을걷이에 맞춘 풍성함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단풍과 어우러진 합창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옥색, 하양, 노랑 저고리에 빗장 지른 자주고름이 바람에 날리듯 한다.
완만하게 깎아 놓은 내장산의 산허리를 가로질러 걸으며 자박자박 낙엽을 밟았다. 그곳은 바람 소리가 장단을 맞추며 뉘엿뉘엿 가녀린 소용돌이 밀어를 나누는 숲속이었다. 계절이 수평 이동을 한 11월의 단풍 속으로 걸으니 그곳은 올해에도 가을이 되어 있었다. 가을의 내장산 계곡에는 물고기가 이리저리 꼬리를 치며 여린 파도를 일으키니 내장산의 단풍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배낭 속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던 전어회가 쟁반에 닻을 내리고 삼치회 입속에서 추억을 남긴다. 여름을 보낸 봉숭아 꽃진 자리 옆에서 능소화는 수줍은 미소를 흘린다. 갈바람은 밤을 내려 벤치에 관객으로 앉히고 고추를 붉게 익혀 하늘을 더 높였다.
여름을 집어삼킨 내장산의 가을하늘 배불러 살찌고 구름이 채찍질하니 정녕 내장산의 단풍은 우물 속으로 자맥질을 한다. 산등성이 초록 바람 아슬아슬하게 불어와 엷은 몸을 숨기니 한여름을 견뎌낸 낙엽은 지고 초가을을 잉태한 만삭의 가을이 뒤뚱거리며 산을 더듬는다.
바위도 회색빛으로 젖어 가을의 노래를 듣는다. 가을의 사랑이 더욱 깊어만 간다. 내장산의 가을이 색소폰을 연주하고 억새와 풀은 합창을 들려주기도 한다. 가을은 자연이 버린 시간 들의 조각들을 가져가는 계절이라 단풍 잎 한 조각에도 생이 깃드니 그냥 흘려보내야 한다. 우리의 삶이 한 꺼풀 더 포개지더라도. 그래서 가을은 더욱 가을이다.
내장산 단풍의 그리움은 안개 속을 헤매다 걷히는 마지막 전설이다. 산등성이에 닿는 돌아온 개선군이 깃발을 올리고 왔을 때에야 비로소 끝나고 시작되는 일이기도 하다. 내장산의 가을은 미로를 헤쳐 나오다 조그만 돌 위에서 몸을 쉬게 하는 것. 하나둘 쌓인 흔적을 가지런히 엮어 잊혀지지 않을 추억으로 새겨 두는 일이다.
그래,
내장산 가을의 그리움은 시간이 접힌 자국에 싹을 틔우고 나의 가슴에 “그리움”이라 써 붙여 다니는 희망이 서린 일이다. 오래된 동그란 기억들을 맴돌다 날려 버린 조각들이고 지난밤을 태워 새벽을 오게 하는 소용돌이를 추억하는 일이다.
내장산의 가을을 뒤로하고 내려올 때 하늘은 단풍으로 변한 솜털 향기를 내려주고 있었다. 노루 꼬리만 한 석양이 은쟁반의 구슬처럼 부드러운 물이랑을 만드는 저문 밤에 올가을 내장산에 ‘단풍’이라는 방점을 찍고 내려오는 하산 길이 아쉬웠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wavekt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