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無盡藏). ‘덕이 넓어 다함이 없음’을 뜻하는 불교 용어다. ‘엄청나게 많다’는 이 말 뜻과는 관계없이, 전북 내륙 산간 오지로 꼽히는 세 고장 무주·진안·장수(茂朱·鎭安·長水)를 함께 이를 때도, 흔히 앞 글자를 따 ‘무진장’(茂鎭長)이라 표현한다.
한 여름 같은 6월의 어느 일요일, 호남의 종산인 장수 장안산을 찾는다. 장안산은 백두대간 산줄기에서 뻗어 내린 전국의 8대 종산(백두, 한라, 지리, 설악, 덕유, 치악, 오대, 장안) 중 호남종산에 속하며, 이 중 제일 광활한 면적을 자랑한다. 장수군의 장수읍, 장계, 천천, 계남, 번암등 5개면을 경계로 두고 있으며, 주변 일대의 덕산계곡, 용소의 비경 등 숲의 경관이 빼어나게 수려하여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여름에는 계곡 피서, 가을에는 억새와 단풍으로 유명하다.
산행 들머리인 무령고개 주차장에 도착한다. 버스로 이동 중에 비가 많이 내려 걱정했는데 이곳에서는 기세가 줄어들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장안산 산행 들머리인 무령고개는 백두대간에서 갈린 금남호남정맥이 영취산을 벗어나면서 제일 먼저 숨을 고르는 곳이다. 반대편 등로는 백두대간인 영취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팔각정에서 바라보면 백두대간 마루금 너머로 정상부가 운무에 덮힌 남덕유의 동봉과 서봉의 웅장한 모습이 감동스럽게 다가온다. 장안산은 영취산에서 출발, 무령고개에서 숨을 고른 뒤 온 힘을 모아 솟구친 금남호남정맥의 최고봉이다. 이 때문에 주변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그리고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시원하게 펼쳐진다.
장안산의 또 다른 명물은 산등에서 동쪽 능선으로 펼쳐진 광활한 억새밭이다. 가을에는 흐드러지게 핀 억새가 만추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음률에 맞추어 춤춘다. 햇빛 피할 데 없는 능선에 보슬비가 내리니 오히려 산행하기 수월하다.
괴목고개를 지나 제1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 데크가 야영객들 텐트로 점령당해 전망대 구실을 할 수 없다. 다른 산객을 배려하는 야영객들 자세가 아쉽다.
장안산은 전형적인 육산이어 산행하기 쉬운 산이다. 솔가리와 푸석이는 낙엽이 혼재된 산길은 푹신푹신하여 발바닥에 느끼는 감촉이 너무 좋다. 제2전망대로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제1전망대가 아스라이 멀게 보인다.
지지계곡은 장수의 장안산과 백운산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만나 만들어진 오지의 계곡이다. 장안산과 백운산 사이의 무룡고개를 상류로 무룡고개가 있는 곳, 우측 영취산 끝자락과 좌측 장안산 끝자락이 서로 모이는 곳이다. 섬진강 지류인 요천의 발원지로 이 계곡물은 동화호에 몸을 담궜다가 다시 남원을 지나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그래서 지지계곡을 섬진강의 최상류라고 한다.
제2전망대로 오르는 나무계단 좌우가 모두 억새군락지이고 이제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침내 장안산 정상인 상봉(1,237m)에 도착한다. 등로 초입부터 정상까지 '내내(長) 편안(安)'했다. 그래서 장안산(長安山)이던가. 우측 아래 월경산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대간 너머로 운무가 춤을 춘다. 운무 너머 좌로 산청의 웅석봉, 우로 지리산 마루금이 손짓한다. 지리산은 오늘따라 운해에 몸을 담구고 그 웅자를 잘 보여주지 않지만 준엄한 천황봉만은 구름 위로 솟아 그야말로 '하늘의 왕'(天皇)답다.
하산은 범연동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등로의 나리꽃이 안개비에 젖어 힘겹게 서있지만 단아한 모습이 매력적이다. 하산 길에 만나는 중봉(1,234m)에서 30분 정도 급경사 길을 내려서면 덕산계곡 초입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계곡 트레킹이 시작된다.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금남호남정맥은 바로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 된다. 바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즉, 산이 곧 물을 나눈다.
계곡물은 처음에는 발목만 가볍게 적시다가 하류로 내려갈수록 무릎까지 차오르면서 굉음을 내며 몸을 밀어낸다. 장안산에서 발원하여 용림천으로 흘러드는 풍치절경의 골짜기가 덕산계곡이다. 이 계곡에 '덕산용소'가 있다. 덕산용소는 '큰 용소'와 '작은 용소'로 이루어져 있다. '큰 용소'는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을 휘감아 도는 맑은 계류 위로 넓은 암반이 펼쳐진다.
장안산 줄기의 오른쪽 물은 모두 금강으로, 왼쪽은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따라서 금강과 섬진강의 최상류, 즉 시원(始原)이 이곳이다. 여기 이름이 '긴물'(長水)인 까닭이다.
골짜기 물의 소임은 맑은 물을 하류로 내려 보내는 일이다. 그래야 하류의 물이 정화된다. 계곡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소리가 더 커진다. 울창한 계곡 사이로 노도처럼 흐르는 급류를 보니 두려움이 엄습한다.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얼마나 절망적이고 나약한 동물인가. 자연에 대한 방자함은 어느새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를 경외감이 메운다. 가랑비 속에 처연히 서있는 나무들도 무심히 빗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이다. 그들을 바라보니 저절로 겸허해진다.
이윽고 산행 날머리인 덕산계곡 연주마을에 도착한다. 오늘 지나온 시간들의 굽어진 길이 꿈결처럼 아련하다.
산골마을인 연주마을은 한낮이지만 산자락 공기는 소슬하고 그림자가 서늘하여 산객의 마음은 새벽같이 깨어 있다.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 내 눈을 잡아 당겼던 접시꽃과 작별을 고하고 산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