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 칼럼] 라싱

김태식

선박에 실린 모든 물건은 묶어야 한다. 화물창에 실린 화물은 말할 것도 없다. 육지와는 달리 항상 세찬 바람과 파도를 접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육지에서처럼 모든 물건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묶는 것을 라싱Lashing이라고 한다. 

 

책상은 고정되어 있다. 의자는 물론이고 식탁 심지어 필기도구에 이르기까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물건에 대해서 묶어 두어야만 한다.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대해 라싱을 해야 하는 것이다. 라싱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 때는 배의 심한 움직임으로 인해 물건들이 떨어지는 순간 흉기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내가 근무하던 선박은 아프리카의 남아공화국으로부터 광석을 싣고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광석은 알갱이로 된 화물이기에 라싱을 할 수 없다. 액체를 싣고 다니는 유류운반선도 마찬가지다. 이 화물은 무게중심이 하부로 쏠리기 때문에 심한 파도에는 대단히 위험하다. 

 

파도가 심하게 부딪치면 선체가 힘들어하는데 마치 끙끙 앓는 것 같은 소리를 토해 낸다. 일본 도착을 5일 정도 남겨두고 대만 해협을 통과하는 배는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일 년 내내 태풍이 끊이지 않는 해역이기 때문이다. 그 해역을 항해 중인 다른 선박과 교신을 하게 되었다. 한국의 'K해운'선박이었다.

 

“어디에서 출항했습니까?”

“아프리카의 ‘더반’에서 광석을 싣고 포항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저희와 항로가 비슷하군요. 파도 상태는 어떻습니까?”

“파도가 너무 높아 매우 힘이 듭니다.”

 

10여 분간의 교신 중에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다. 우리도 힘든 황천항해(荒天航海:항해 규정상 태풍으로 인하여 배가 시속 2km이내의 속도로 진행하는 것, 즉 죽음의 항해)를 하고 있던 터라 교신 중에 아무런 양해 없이 통화가 끊긴다는 것은 좋지 않은 상황임을 말한다. 

 

우리의 배도 너무 높은 파도로 인해 기우는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우리 배의 통신실에는 긴급조난 구조신호SOS가 쉴 새 없이 날아든다. 그 해역을 통과하는 선박에게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모든 선박으로 타전되는 내용이었다. 

 

“H호 대만해협 근처에서 침몰 중”

 

나의 눈을 의심하고 싶었다. 조금 전 우리와 교신하다 연락이 끊긴 K해운의 ‘H호’라니...… 우리 선박으로부터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져 항해하던 배가 태평양 해상에서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다. 라싱을 할 수 없는 화물인 광석을 실은 배, 20층 아파트 높이에 길이 200미터가 넘는 배가 25명의 한국선원 모두를 안은 채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분이었다. 

 

승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커다란 배가 순식간에 물속으로 잠적해 버린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높은 파도가 덮치면 화물은 한쪽으로 쏠리고 배는 순간적으로 무게중심을 잃고 뒤집힌다. 

 

훗날 내가 대양을 항해하던 일을 마치고 육상 근무를 할 때 회사에서나 집에서 묶여져 있지 않은 TV가 불안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전화기가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주방 기구 등이 금세 와르르 무너질 것 같고, 라싱이 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 방의 책상과 의자가 불안하여 정신적인 압박감으로 고통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나는 움직이는 물건은 모두 묶여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간간이 한다. 묶어야 안전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wavekts@hanmail.net

 

작성 2023.11.28 09:22 수정 2023.11.28 09:35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2025년 6월 18일
2025년 6월 17일
2025년 6월 17일
2025년 6월 17일
피아니스트 양명진, 2025 독주회 개최#양명진 #피아니스트양명진 #피아..
이란에 말바꾼 트럼프의 진짜 속내는?
2025년 6월 16일
2025년 6월 16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ESN쇼츠뉴스]‘2025 인천국제민속영화제(IIFF 2025), 이장호..
[ESN쇼츠뉴스] 킹오브킹스 K애니로 만나는 예수 K 애니로 탄생 킹오브..
[ESN쇼츠뉴스]봉사 / 환경 / 고양재향경우회, 국민과 자연 잇는 자원..
[ESN쇼츠뉴스]김명수 응원 인천 민속영화전통과 영화가 만나는 자리 인..
천재 로봇공학자의 ADHD 고백 #제이미백 #스위스로잔연방공과대학 #로보..
세상에서 학력보다 중요한 것은?#닌볼트
생존 문제가 된 은퇴, 평생 먹고 살 대책안은? #은퇴자금 #은퇴전문가 ..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