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 칼럼] 친구를 찾을 나이

허석

술을 끊어보았다. 애주가로 자처하는 사람이 금주라니, 늙숙해졌어도 여전히 사랑 타령하는 아내 부탁 하나 못 들어주겠느냐 하는 낭만적인 이유에서였다. 술만을 위한 자리는 자연 피하게 되고 술을 권하거나 받기도 사양하는 처지가 되었다. 불편함은 나보다 상대방에게 있었나 보다. 만나자는 전화도 차츰 줄어들고 거리낌 없던 술자리 떠벌림이나 농지거리도 서먹한 모양새가 되었다. 술을 빼버리고 나니 굳이 만나야 할 이유도, 반가움도 시들해졌다. 그 많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알고 보니 모두 술친구였다. 

 

수첩 빼곡한 친구나 지인들의 숫자를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마당발이라거나 인맥이 두텁다는 사회적 능력의 척도이기도 했던 것 같다.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거나 대단한 무기가 숨겨진 사람처럼 비치길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말에 수첩 정리를 할 때면 얼굴은커녕 전화 한번 안 해본 사람이 태반이었다. 오뉴월 보릿자루 끌어안듯 숫자만 늘려가다가 몇 년간의 유효기간을 둔 뒤에야 마지못해 지워버리곤 했다. 

 

나이에 따라 어울리는 친구도 달랐던 것 같다. 어릴 때는 같이 잘 놀아주고 마음 착한 친구가 최고였다. 청년 시절에는 패기와 의리가 있어 영웅적인 기질이 돋보이는 친구와 가까이 한 반면, 중년에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무슨 일이든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우선이었다. 그런 사람은 친분 여부를 떠나 무조건 잘 아는 사람이고, 특별한 관계이고, 호형호제하는 사이처럼 자리매김했다. 술친구, 고향 친구, 학교 친구가 필요에 따라 평생 동지, 그냥 알고 지내는 지인, 모르는 척하는 사람으로 재편성된 셈이다.

 

친구에게 몰두하고 전력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외로울 때 내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 전제였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접근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감정적인 교류는 없어도 의리를 위해서는 흔쾌히 금전적인 보증도 서 줄 수 있는 무한대의 우정만을 기대했다. 이해관계가 앞선 친구와는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조금만 서운한 감정이 생기면 자존심이 대립, 서로에게 상처와 불신만 남기는 불완전한 관계이기만 했다. 세상과 따지듯이 사느라 뭘 하나 수월한 게 없었다.

 

삶을 투쟁이나 전쟁터로 여기지 않았나 싶다. 성공하고 승리해야 한다는 목표에 목을 매달고 사느라 친구에 대한 친소(親疎)도 능력과 배경을 우선시한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난 학벌이나 재력이나 사회적 위치에만 눈을 돌리고 그 사람이 가진 품성이나 의식이나 삶의 태도가 어떤지는 무관심했다. 명함 한 장으로 인생 전체의 평가하려 했을뿐 사람 됨됨이가 어떠한지 깊이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듯이, 후박(厚薄)을 둔 세상살이가 졸렬하고 비겁했다. 시기, 질투, 교만, 탐욕이 매번 앞장섰다.

 

어느덧 은퇴 나이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남을 따라잡으려고 애끓는 욕심도, 누구처럼 되고 싶어 고심할 필요도 없는 나이가 되었다. 남들 부러워할 일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삶에 충실해지면서 자연히 친구에 대한 의미도 달라지는 것 같다. 잇속과 실속을 염두에 둔 그런 외피적인 친구가 아니라 낯설고 두려운 인생길에 마음에 위안과 평안을 주는 사람에게 자연 눈길이 가게 된다. 자신의 약하고 못난 속내까지 훌훌 털어놓을 수 있는, 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그리운 날엔 육필로 편지 한 통 보낼 수 있는, …… 그런 정인이 나에게도 있는지 모르겠다.

 

수많은 세상 안에는 나와 공명을 일으키는 무늬가 있다고 한다. 한 개의 현이 울리면 그와 비슷한 파장을 가진 현들이 따라 운다는 엠퍼시(Empathy)다. 기질과 취향과 문화가 비슷한, 같은 문법을 사용하는, 서로가 서로를 닮은, 마음과 관념과 정서로 소통하는 친구일 것이다. 침전된 삶의 노폐물을 정화하고 살아온 신념과 가치를 서로 옹호할 수 있는 진정한 씨동무를 찾고 싶다.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몇 년 만에 만났어도 어제 만난 것처럼 마음에 거리감이 없는 그런 친구일 것이다. 같이 시간을 보내며 한마디 말도 없었는데도 마치 오랜 세월을 두고 마음의 대화를 나눈 것 같은 허물없는 친구다. 격식을 차리느라 눈치 보지도 않고 도움을 준 것에 고맙다는 소리를 기대하지도 않는 막역하고 홀연한 그런 사이이다.

 

세상 사는 이치와 방법이 서로 다르면서 친구라는 이유로 무조건 손을 들어주거나 화를 참아내려고 애쓸 필요도 이제는 없을 듯하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사람이 되려고 두루두루 마음에 두느라 애태우고, 힘들어하고, 아쉬워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심적 부담감도 이제는 갖고 싶지 않다. 내가 기쁘고 즐겁지 않은데 굳이 어울리고 시간을 함께해야 할 이유가 따로 있을까. 유유상종이라고, 그는 

그에게 맞는 친구가 있을 것이고 나는 나에게 편안한 친구가 있는 것이다. 

 

무더기로 친구 사귈 나이도 아닌 것 같다. 책과 친구는 수(數)가 적더라도 내용이 좋아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친구의 많고 적음이나 새로 만나는 친구가 있고 없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나에게 어울리는 친구는 이미 내 안에 있다. 내 주변에 그림자처럼 항상 있어 왔고 지나온 인연 속에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정작 관심과 성의를 기울여서 소중하게 대접해야 할 사람이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이다.

 

남 눈치 볼 줄 알고, 작은 일에도 쉽게 감동 받고, 벙긋 웃으면 어린아이 같고, 나이 들어서도 부끄러움이 여전한 그런 사람이다. 순하기도 하지만 남을 위해 배려와 겸손이 앞서는 선한 사람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내가 찾는 친구이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3.12.12 09:39 수정 2023.12.1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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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