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인문기행 - 알함브라(Alhambra) 궁전의 추억

알바이신 언덕에 서서 석양에 물드는 알함브라 궁전을 바라보다


고등학교 때 클래식 기타 연주회에 갔다가 한 여고생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트레몰로 주법으로 기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문화적 충격의 무아지경에 빠졌던 추억이 떠오른다. 당시 기타가 토해내는 구슬프고 애절한 선율에 거의 넋을 잃을 뻔했던 추억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부터 알함브라 궁전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기대는 수십 년 동안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지금도 이 곡이 흘러나오면 꿈결에 젖어 안달루시아의 풍경 속을 헤맨다.

 

예로부터 석류가 많이 생산되어 석류라는 뜻을 지닌 그라나다는 에스파냐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험준한 산악지역 시에라네바다 산맥 북쪽에 위치한다.

산악 지대인 그라나다는 척박한 땅이다. 1236년 이슬람 무어족이 나스르 왕조를 세운 후 1492년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 즉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도에 의해 이슬람 세력이 축출된 해까지 256년을 버틴 곳이다.

 

어느 아랍 시인은 '그라나다는 에메랄드 같이 빛나는 오리엔트산 진주' 라고 노래했다. 그라나다에는 이슬람 왕조의 왕궁이자 요새였던 알함브라 궁전이 있기 때문이다.


알바이신 언덕에 서니 알함브라 궁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우리나라 방송사에서 똑같은 제목으로 방영된 드라마 때문에 요즘 다시 관심을 끄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붉은 성이라는 뜻의 알함브라 궁전은 에스파냐의 마지막 이슬람왕조인 나스르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후반에 건축하기 시작하여 여러 해 동안 증축과 개수를 거쳐 완성되었으며, 성채인 알카사바, 나스르궁, 카를로스5세 궁, 헤네랄리페 정원 등 4개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왕궁 정문을 들어서면 헤네랄리페(Generalife) 정원이 나온다. 14세기 초에 조성되었으며, 왕의 여름 별궁이다. 꽃향기가 전달되는 높이까지 계산해서 디자인했다는 그 정원에서 아름다운 알바이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곳은 왕궁의 하렘(harem)으로 왕 이외에는 여자와 환관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리석 기둥 124개와 기둥 윗면 장식, 그리고 마당 가운데 분수가 보태어 만들어낸 전체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세로형 정원의 중앙에 수로를 설치하고 좌우로 분수를 두었고 주위에는 정성껏 가꾼 꽃과 담쟁이덩굴이 만발해 있다. 물과 정원수가 어우러진 경관은 이슬람 조경의 특징이다.

 

 


 

알바이신의 언덕 위에는 거대한 아랍인 주거지역이 먼저 형성되었고, 그 후에 왕과 귀족들의 거주지로 알함브라 궁전이 만들어졌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기도 한 이 궁전은 아랍 건축물의 걸작으로 평가되는데, 평균 관람 시간만 무려 3시간이 걸릴 정도로 넓은 요새이자 수 천 명의 귀족들이 살았던 주거지였다.


알함브라 궁전은 사실 건축학적인 가치보다는 높은 지대까지 물을 끌어 사용했던 아랍인들의 치수의 지혜, 즉 발달된 관개 기술이 돋보이는 곳이다. 지금도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궁전 곳곳의 분수와 샘, 연못은 이슬람세력이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성채인 알카사바는 그라나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구릉 위에 세워진 성보(城堡)인데, 알함브라 궁전의 영광과 오욕을 모두 겪은 곳이다. 전망대인 벨라탑에 서면 시에라네바다의 눈 덮인 연봉이 보인다. 멀찌감치 계곡 건너편에는 알바이신 지구 사크로몬테 언덕의 집들이 하얀 띠를 이루고 있다. 바로 이 장면까지 보태어 알함브라 궁전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스페인에서 가장 로맨틱한 건축물인 나스르궁은 워낙 관람객이 많아 사전에 예약된 정해진 인원만 시간대별로 입장시킨다. 나스르궁에는 대리석, 타일, 채색옻칠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장식의 방이 2개의 커다란 파티오(中庭)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카톨릭 정복자들은 알함브라 궁전의 이슬람 서적은 모두 불태웠으나 궁전만큼은 너무 아름다워 파괴하지 않았다고 한다.



 

코마레스궁은 정원 연못에 비친 탑의 반영이 인도의 타지마할과 흡사한데, 실제로 타지마할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사각형의 연못을 따라 한쪽은 공식적인 알현 장소인 대사(大使)의 방으로 연결된다. 패자인 보아브딜왕과 승자인 이사벨 여왕 사이에 그라나다를 양도하는 조인식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무하마드 5세가 만든 사자의 파티오가 있는 라이언궁은 8두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분수반을 중앙에 두고 촘촘히 선 문주의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고, 천장과 벽면은 아라베스크의 아름다움으로 알려진 두 자매의 방을 비롯해 주위의 여러 방들과 함께 매력이 넘친다. 왕의 후궁들이 기거했던 하렘이 있다.

 

 



돔이 멋진 아벤세라헤스방에는 끔찍한 사연이 담겨있다. 자신의 왕비가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남자와 밀통한 것을 알게 된 그라나다의 마지막 왕 브외브딜이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남자 36명에게 연회를 베푼다며 이곳에 초대한 후 이들을 모두 죽이는 바람에 이들이 흘린 피가 수로를 타고 파티오로 흘러가 분수대 사자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질투에 눈이 멀어 저지른 한 인간의 잔인함, 과연 그 끝은 어디인가.

 

술탄이 살았던 궁내부는 다양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으며, 변화가 많은 아치, 섬세한 기둥, 벽면 장식, 종유석 천장 등 모두가 정교하고 치밀한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치장하여 이슬람 미술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로마가 패망한 후 유럽에서는 예술 분야가 잠시 휴식기에 든 동안 이슬람 무어족들이 유럽에 진출하여 건축과 예술 분야에서 유럽 대륙에 한줄기 빛을 비추는 바람에 르네상스 운동에 불을 지핀 동기가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으로 남아있던 그라나다는 왕족과 귀족들 간 내분이 심화되어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 왕국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이 결혼하면서 더욱 강력한 기독교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마침내 1492년 그라나다는 기독교 왕국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남은 이슬람 문명은 사라지게 되었다.

 

보아브딜 왕은 그라나다를 잃는 것보다 알함브라 궁전을 잃는 것이 더 가슴 아프다.”라는 말을 남기고 북아프리카로 떠난다. 신하들을 이끌고 궁을 나온 보아브딜 왕은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기 전에 뒤돌아서 이 아름다운 궁을 다시 바라본다.


햇빛에 빛나는 궁은 오늘따라 눈이 시릴 정도로 더욱 아름답다. 궁의 마지막 모습을 가슴깊이 간직하려고 한참을 바라보는 왕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흐른다.


남의 땅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와 멋진 성을 쌓고 주인으로 살아왔던 800. 패망하기 전 6만이 거주하던 대도시. 이제 기운이 다한 땅 위의 붉은 성은 석양에 물들어간다.

 

알바이신 언덕에 서서 석양에 물들어가는 이슬람 건축의 백미 알함브라 궁전을 바라본다. 왕은 떠나고 이슬람 문화의 찬연함을 간직한 채 홀로 오롯이 남게 된 궁의 애절한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온다.

 

잔잔한 달빛이 비추는 언덕 위 공터에서는 길거리 악사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기타 연주가인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기타로 연주하고 있다.


실연의 상처를 안고 알함브라 궁전을 찾은 타레가는 달빛이 드리워진 궁전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며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애잔한 분위기와 낭만적인 멜로디는 알함브라 궁전의 정서와 어찌 이리도 잘 어울리는지.

 

이베리아 반도 무어인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의 눈물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선율에 맞춰 오늘도 자신이 사랑했던 라이온 궁의 분수대에서 낙숫물 되어 떨어지고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7.01 10:55 수정 2019.07.0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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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1/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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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뽕님 (2019.07.0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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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