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역사는 반복된다

이봉수

358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인 임진왜란과 6.25 한국전쟁을 비교해 보면 너무 비슷한 점이 많아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실감 난다. 전쟁 발발 전 국내외 정세와 전쟁의 경과는 물론이고, 외국 군대의 개입과 정전 협상 과정도 두 전쟁은 판박이처럼 닮았다.

 

1592년 4월 13일(이하 임진왜란 관련 날짜는 음력)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조선은 전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 율곡 이이가 "조선은 이미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조정은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1590년 일본으로 보낸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침공이 있을 것인가를 두고 서인인 황윤길과 동인인 김성일이 상반된 보고를 했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20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란 길에 올랐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국군은 이승만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허풍을 쳤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있었던 1950년 6월 25일 대부분의 장병들은 농번기 휴가나 외출 외박을 나가 있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관군은 지리멸렬했다.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패하고 신립 장군이 지휘한 8천 명의 관군은 1592년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했다. 이후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출했다. 선조는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망명할 계획까지 수립했다. 

 

이때 관군을 대신하여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했다. 경상도 의령에서 곽재우, 고령의 김면, 합천의 정인홍, 영천의 최응사, 전라도의 김천일과 고경명, 충청도 옥천의 조헌, 함경도의 정문부 등이 창의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다. 금강산 건봉사에서는 사명당 유정을 비롯한 수도하는 스님들이 승병을 일으켜 살생유택의 기치 아래 왜군과 싸웠다.

 

6.25 한국전쟁도 마찬가지다. 개전 초기 불과 두 달 만에 국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는 수모를 겪었다. 정규군이 지리멸렬하는 것을 보고 전국의 학생 275,200명이 일어나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적과 싸웠다.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전투에서 산화한 71명의 학도의용군 덕분에 시간을 번 국군이 포항을 탈환할 수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학도의용군 772명이 감행한 장사상륙작전으로 적의 주의를 분산시켜 대규모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개전 초기에 일본에서 유학하던 학생들도 자진 귀국하여 참전 대열에 동참했다. 철도 공무원들은 기차를 몰고 인명 구출과 보급작전에 뛰어들었고 경찰들도 대거 낙동강방어전에 자진 참전했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낙동강방어선은 무너졌을 것이다.
 

임진왜란 최악의 순간에 명나라 원군이 참전하여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싸움이 아닌 동북아 전체의 국제전으로 번졌다. 1592년 6월 19일 명나라 조승훈 선발대 1,600 명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평양성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여송의 본대가 와서 조선의 승병과 합세하여 1593년 1월 9일 평양성을 탈환했다. 이때부터 왜군을 얕잡아보고 서울로 진격하던 명군은 1월 27일 벽제관에서 대패하고 개성으로 물러났다.

 

6.25 전쟁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유엔군이 참전하여 국제전으로 확전 되었다. 선발대로 왔던 미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조승훈 선발대와 비교된다. 이들은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전투에서 맥없이 북한군에게 궤멸되었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열을 정비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파죽지세로 38선을 돌파하며 북진했다. 

 

그러나 대규모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와 매복해 있는 것을 모르고 압록강변의 초산까지 진출했던 국군과 미 해병 1사단은 1950년 11월 17일부터 시작된 장진호전투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흥남 철수작전을 펼쳤다. 조명연합군의 벽제관전투 패배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임진왜란은 벽제관전투 패전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강화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은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에 진행되었으며 조선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1593년 4월 9일 강화협상이 타결되어 일본군은 일시 철군을 했지만, 심유경과 고니시가 협상 결과를 속여 보고한 것이 밝혀져 격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불패의 신화를 기록하며 한산도에서 이루어 놓은 최강의 삼도수군은 원균이라는 잘못된 지휘관 한 명 때문에 1597년 7월 15일 칠천량해전에서 궤멸되고 말았다. 이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은 같은 해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1598년 11월 19일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순국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개입한 명분을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한다.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도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공의 속셈은 자기 영토 밖에서 싸운다는 전략이었으며, 팔로군 출신의 조선족을 대거 앞세워 참전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참전했던 것도 순망치한(脣亡齒寒)을 걱정한 명나라가 자기들 울타리 밖에서 싸우기 위해 대규모 원군을 파견했던 것이다. 

 

중공군 참전 후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서로 간에 큰 희생을 치른 지루한 고지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칠천량해전에 비교되는 현리전투가 있었다. 현리전투는 1952년 5월 16일~22일 벌어진 한국전쟁 최악의 패전이다. 원균에 비견되는 당시 3군단장 유재흥은 중공군이 대규모 포위 공격을 해오자 병사들을 버리고 헬기를 타고 도망쳤다. 

 

지휘계통이 무너진 국군 3군단 예하의 3사단과 9사단은 오합지졸이 되어 현리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고 하진부까지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현리전투 결과 국군은 작전지휘권을 미군에 넘겨주었다. 지휘관 한 명의 잘못으로 6.25전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것이 현리전투다. 

 

이 즈음에 휴전협상이 진행되었다. 유엔군사령관과 북한 김일성 그리고 중공의 팽덕회 3자가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뒤늦게 유엔군을 등에 업고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휴전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해버렸다.

 

6.25 한국전쟁은 국제법상으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휴전협정에 서명한 유엔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 3자가 종전협정을 체결하지 않는 이상 전쟁은 휴전 상태로 이어진다. 참담한 현실이지만 여기에 대한민국이 법적으로 끼어들 틈은 없다. 다시 남북 간에 전쟁이 터지면 휴전협정 당사자인 유엔군사령부와 중국이 자동 개입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은 완전히 끝난 전쟁일까.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군 명령이 내려진 일본군은 일본으로 돌아가고 종전이 되었다. 임진왜란의 결과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정권이 교체되었고, 원군을 보낸 명나라는 쇠하여 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도 왕조는 유지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355년이 지난 시점인 1910년에 조선은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앞으로의 역사는 또 어떻게 반복될지 모른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반복되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했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https://yisoonsin.modoo.at

 

작성 2024.01.29 16:08 수정 2024.01.2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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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