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지 칼럼] 진상의 나라

조윤지

공정성만 외치는 한국 사회, 이대로 괜찮은가

 

요즘 세상이 아주 뒤숭숭하다. 길거리만 걸어 다녀도 뭔가 날이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미세먼지 만큼이나 유해한 일들이 한국의 대기를 뒤덮고 있다. 사람들의 정서는 불만과 불안으로 물들었다. 그런 파동이 느껴진다. 누구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기를 쓴다.

 

나는 노오력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네가 뭔데 거저먹으려고 난리야. 아무리 뭣같아도 게으른 놈들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으니 너도 한 번 당해 봐. 한국 사회의 기본 마인드가 이렇다. '내가 내 인생 희생한 만큼 보상 받아야겠고, 잘 되고 싶으면 너도 네 인생 갈아넣든가'라는 식이다. 늘 사회의 화두는 '공정성'이다. 그놈의 공정, 공정. 자본주의는 공정해야 하고, 공정하다는 믿음이 그 무엇보다 견고하다. 하나님 부처님 안 믿는 사람도 자본은 숭배한다.

 

부자는 노력해서 공정하게 부자가 되었고 빈자는 게을러서 빈자가 되었으니 그렇게 살아 마땅하다. 자본주의 복음 제1장 1절이다. 아무도 이게 타당한 일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롤모델은 언제나 억만장자다. 부자의 법칙이니 돈의 법칙이니 뭐니 하는 책이 징그럽게 쏟아져 나온다. 일론 머스크 가라사대 아침 다섯 시에 기상할 것이며...

 

그런데 이런 믿음이 팽배해지고 세상은 더 살기 좋아졌는가? 살기 좋아지긴커녕 살림살이는 밤고구마만큼이나 팍팍해졌다. 목구녕이 턱턱 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밤고구마는 그래도 달기라도 하지. 현실은 한약보다 쓰다. 도시민들의 분노나 욕구불만은 배설되지 못하고 날로 날로 쌓인다. 소비자가 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계산하기, 따지기, 갖고 싶다 떼쓰기, 마음에 안 든다 징징거리기 밖에 없다. 집 안에서 홈쇼핑, 먹방, 여행 방송을 보면서 먹고 싶다, 가고 싶다 사고 싶다 징징거리는 어린아이로 전락한다. 정신은 점점 유아기 수준으로 퇴화한다. 이래서 하버트 마르쿠제는 소비자를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했구나.

 

도시 사람들은 생산자나 생산국의 노고 따위 안중에도 없고 그저 배달시킨 음식이 맛없다, 식었다, 늦는다, 비싸다 짜증 내기 바쁘다. 정작 손 하나 까딱 않고 당신네 식탁에 완성된 음식이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력과 자원이 쓰였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철부지도 보통 철부지가 아니다. 철없는 도시민답게 겨울에도 봄 딸기를 찾고 샤인 머스캣을 먹는다.

 

공정성이라는 함정카드는 여기에서 발동한다. 사람이 돈을 매개로 "거래"를 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손익을 따지기 마련이다. "거래"에서는 내가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거래의 원칙은 "공정성"이다.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내가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적다고 생각되면 불만이 생긴다.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화폐 경제의 지배적 정신은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불만의 정신이다.

 

하지만 주고받음이 거래가 아니라 관계를 매개로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컨대 누군가가 머리를 자르고 싶어 한다고 하자. 머리 손질에 재주가 있는 사람이 그를 도와주고 싶어서, 즐겁고 싶어서 머리를 잘라주었다. 여기서 머리를 손질받은 사람은 그 마음이 고마워서라도 머리 모양이 완벽하네 마네를 따지며 지랄 부리기엔 미안해진다.

 

마침 머리 손질을 받은 사람은 요리에 재주가 있어서 답례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서로가 좋아하는 일로 상대방을 위해 선물을 한 셈이므로 여기에서 오가는 정서는 감사와 호혜다. 도와주고 싶다, 보답하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이 지배적이다. 얻어먹는 밥이 맛이 있네 없네 툴툴거리는 행위가 무례하다는 것쯤은 MZ들도 알 것이다.

 

다시 공정이라는 단어로 돌아가 보자. 공정성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뭐가 있을까? 공정한 봉사, 공정한 사랑, 공정한 신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다소 어색한 수식어처럼 느껴진다. 봉사, 사랑, 신뢰라는 말 앞에 공정이 붙는 것은 글쎄,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러나 공정한 거래, 공정한 경쟁, 공정한 싸움, 공정한 경기... 이러한 말들은 비교적 친숙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붙으니 공정이라는 수식어가 아주 익숙하다. 얼핏 좋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뒤에 붙는 단어를 살펴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사랑, 봉사, 신뢰와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그렇다.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전투적인 행위다. 기쁨과 보람이 퐁퐁 샘솟고 평화로운 성격의 이완된 정서와는 다르다. 공정은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는 일에 붙는다.

 

내가 학창시절 놀지도 못하고 친구를 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면, 그게 잘못되었다고 느낀다면 우리 세대에서 맥을 끊자고 이야기해야 건전한 사회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내가 그렇게 노력해서 명문대를 나왔는데, 어떻게 지잡대 출신이랑 감히 같은 취급을 하려 드냐는 마인드로 이 악순환을 대물림시킨다. 이런 걸 두고 성숙한 시민 의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평생을 그렇게 사춘기 어린애 같은 관점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런 게 진정한 성장이라 할 수 있는가? 이대남의 절규, 세대갈등, 극단적 개인주의는 다 이런 공정 타령에서 시작되었다. 공정이라는 말은 '내 이익만 제대로 챙겨 받으면 아무 문제 없다'라는 이기주의의 함축어다.

 

그렇게 전국민이 '진상손님화' 되어간다. 진상손님 마인드가 디폴트인 사회를 두고 정말 건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돈을 매개로 하는 화폐 경제 기반의 사회는 결코 건전한 사회일 수 없다. 도시가 점점 각박해지는 이유는 경제와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도록 그 권리를 위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봉사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노오력했으니 정당하다는 생각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깨지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내가 노오력해서 얻은 결과이니 부자가 되는 건 타당하다. 반면 빈자가 되는 것은 게으른 탓이니 그 또한 타당하다. 이게 얼마나 헛소리인지는 부자와 빈자의 주체를 개인이 아니라 국가로 바꾸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다.

 

세계의 부는 한정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일론 머스크가 될 순 없다. 그걸 알면서도 저 사람처럼 돈을 많이 버는 게 우리의 궁극적 목표라고 이야기하는 건 완전히 기만이다.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없는 걸 뻔히 알면서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삼으라는 말인가. 1등은 꼴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부자는 가난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빛은 그림자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불가분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부자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빈자 또한 존재해야 한다. 그게 누가 됐든 간에. 이건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업을 해서 잘 됐다는 말은 안 그래도 팍팍한 서민들 살림살이 털어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과 같다. 남의 지갑에서 돈이 빠져나와야 내 지갑으로 온다. 이런 자명한 사실도 모르는 건 아닐 거라 믿고 싶다. 이건 약탈이다. 실제로 세계의 모든 식민지배는 이런 식으로 탄생했다. 좋은 것을 줄 테니 당신의 자급 생계 수단을 내 손에 넘기시오.

 

선진 유럽 국가의 식민지배 또한 노오력의 산물이다. 따지고 보면 조선 사람들 국내에만 틀어박혀 탱자탱자 안주하고 있을 때 유럽은 부지런하게 빨빨거리면서 온 세상을 후비고 다닌 결과로 지지 않는 태양을 얻은 셈이니 말이다. 그들도 나름 머리를 써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고 자원을 갈취했다. 능력주의, 노력주의 논리대로면 영국은 노력한 대가로 땅부자가 되었다.

 

어쩐지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나. 우리가 식민지배의 역사는 잘못된 것이라 직시하고 지탄한다. 아무도 그것을 대단하다며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국가가 노력해서 경쟁(전쟁)하고 침략하고 영토를 넓히고 부자가 된 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 그 주체가 개인으로 바뀌면 잘못되었음을 모르는 걸까. 부가 개인의 노력으로 좌우된다는 논리는 식민지배의 이데올로기와 동일하게 작용한다. 노력하면 된다고? 기껏 노력해서 남들과 경쟁이나 하는 게 건전한 사회냐고 다시 한번 묻는다.

 

우리는 이제 공정이라는 논의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공정이 아니라 공생이다.

 

[조윤지]

칼럼니스트

제5회 코스미안상 대상

이메일: younji0621@naver.com 

 

작성 2024.02.13 11:09 수정 2024.02.13 11:59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피아니스트 양명진, 2025 독주회 개최#양명진 #피아니스트양명진 #피아..
이란에 말바꾼 트럼프의 진짜 속내는?
2025년 6월 16일
2025년 6월 16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ESN쇼츠뉴스]‘2025 인천국제민속영화제(IIFF 2025), 이장호..
[ESN쇼츠뉴스] 킹오브킹스 K애니로 만나는 예수 K 애니로 탄생 킹오브..
[ESN쇼츠뉴스]봉사 / 환경 / 고양재향경우회, 국민과 자연 잇는 자원..
[ESN쇼츠뉴스]김명수 응원 인천 민속영화전통과 영화가 만나는 자리 인..
천재 로봇공학자의 ADHD 고백 #제이미백 #스위스로잔연방공과대학 #로보..
세상에서 학력보다 중요한 것은?#닌볼트
생존 문제가 된 은퇴, 평생 먹고 살 대책안은? #은퇴자금 #은퇴전문가 ..
100만 유튜버의 숨겨진 실패 스토리, 이런 과거가?
토막살인은 이 때 나온다! #형사박미옥
전직 아이돌에서 페인트 업체 대표가 된 비결?(feat.긍정의 힘) #오..
요즘 친환경 플라스틱은 생분해가 아닌 바로 이것! #친환경플라스틱 #친환..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