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중에서 1594년 갑오일기에 ‘포구(浦口)’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1594년 7월 17일 일기를 살펴보자.
“7월 17일 맑음. 새벽에 다시 ‘포구’로 나가 진을 쳤다. 오전 열 시쯤에 명나라 장수 파총 장홍유가 병호선(兵號船) 5척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 들어와서 곧장 영문에 이르러서는 육지에 내려 이야기하자고 청했다.”
강화협상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명나라 장수 장홍유가 한산도를 방문하여 4일간 머물다가 7월 20일 떠나는 상황도 난중일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7월 20일 맑음. 이별주를 일곱 잔씩 마신 뒤 닻줄을 풀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갔는데 서로 두세 번 돌아보며 애틋한 석별의 정을 나누고 헤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포구’가 어디인지 궁금해진다. 요즘 일반적으로 포구라고 하면 갯마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말한 ‘포구’는 달리 해석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은 1593년 7월 14일 일기에서 “한산도 두을포로 진을 옮겼다”고 했다. 두을포는 현재 지명으로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의항 마을이다. 의항(蟻項) 마을은 일명 개미목이라고 하며 제승당과 문어포 마을 사이의 깊숙한 내만에 자리 잡고 있다.

두을포에 진을 치고 있던 이순신 장군이 배를 타고 장홍유를 맞이하려 나간 ‘포구(浦口)’는 두을포가 있는 한산만으로 들오는 입구(入口)로 봐야 한다. 명나라에서 큰 손님이 오니 이순신 장군이 한산만 입구까지 마중을 나간 것이다. 장홍유를 전송할 때도 포구 밖에까지 함께 나가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포구’는 한산만으로 진입하는 입구이며, 통영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갈 때 상죽도와 하죽도, 해갑도를 지나 한산대첩비와 거북등대를 지나기 전에 있는 한산만 입구의 해상으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