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고성 아래 호수와 섬, 슬로베니아 블레드

블레드섬 예배당의 종소리에 호수에는 물결이 인다


블레드는 슬로베니아 북서부 어퍼카르니올라주에 위치한 작은 빙하호 마을이다. 알프스 산맥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에는 슬로베니아의 유일한 섬()이 있고,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 있다. 그 성과 호수, 그리고 호수 가운데에 있는 섬 풍경들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적인 휴양지에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있다.


 

 

130m 절벽 위 암벽에 세워진 블레드성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적의 침입으로 정복된 적이 없는 견고한 요새다. 1004년 신성 로마제국의 하인리히 2세 황제가 브릭센의 주교인 알부인 1세에게 하사한 성으로, 한때 루돌프 1세 황제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등 오랫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다가 1918년에 동 제국이 해체되면서 유고 연방에 편입되어 왕실의 여름 거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유고 연방 시절에 티토가 세계 각국의 정상들을 초대한 곳이기도 하다.

 

성문을 지나 조금 올랐는데도 벌써 시가지와 블레드 호수가 보이기 시작한다. 정원 에는 왼쪽은 예배당, 오른쪽은 박물관이다. 16세기에 건축된 고딕 양식의 예배당은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는데 프레스코 벽화가 훌륭하다. 예배당 창 너머로 보이는 블레드 마을이 너무 아름답다. 성과 호수만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예배당 오른쪽이 박물관이다. 박물관 벽에는 헨리크 2세가 주교에게 블레드를 서면으로 건네주는 그림이 걸려있다. 인쇄 공방에서는 옛날 방식 그대로 수제종이에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로 엽서나 책갈피, 기념일 카드 등을 인쇄해주고 있다.


선사 시대에 섬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과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과 풍요의 여신인 지바가 조형물로 전시되어 있다.

 

 


블레드성의 예배당 앞이 최고의 뷰포인트다. 여기에 서면 소스라치는 기쁨과 놀라운 감동으로 온몸은 전율한다. 그리고 누구나 어릴 때부터 꿈꾸어왔던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된다. 계단에서 바라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반짝이는 블레드 호수이다. 그 호수 안 작은 섬에 있는 빼어난 자태의 성모 승천 교회가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호수 뒤편에는 이탈리아 북동부에서 슬로베니아까지 이어지는 알프스 남쪽 줄기의 석회암 산맥인 줄리안 알프스의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줄줄이 도열해 있다. 언제인가 그림엽서에서 본적이 있는 풍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블레드 섬 뒤로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산이 슬로베니아에서 제일 높은 트리글라브산이다.

 

블레드 호수는 여행정보 사이트 트립 어드바이저가 선정한 동화 같은 여행지 톱10’에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세계 각지의 여행객이 찾는 관광 명소인 블레드 호수는 줄리안 알프스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빙하 침식으로 생긴 호수이다.


블레드 섬의 성모 승천 교회에서 울려 나오는 종소리가 물결을 일구니 잔잔한 호수가 잠에서 깨어난다. 줄리안 알프스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내린 빙하의 침식으로 생긴 블레드 호수는 가로 2.1km, 세로 1.4km, 둘레 6km인데 천천히 돌아도 3시간이면 충분하다.

 



블레드 섬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팔뚝 굵고 잘 생긴 뱃사공이 노를 젓는 플레타나라는 나룻배를 타야만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이 배는 뱃머리와 배의 양쪽에 승객들이 빙 둘러앉을 수 있도록 되어있으며, 배의 뒤편은 뱃사공이 노를 젓는 공간이다. 모양새는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이나 20명 정도도 너끈히 탈 수 있을 정도로 그 공간은 의외로 넓다. 나무로 만들어진 나룻배의 특성상 좌우로 흔들림이 심해 어떨 때는 위험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블레드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에 있을 때 플레타나의 숫자를 23대로 한정해서 허가를 해주었는데, 그 원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탄 배의 뱃사공은 체격도 좋고 미남이다. 뱃사공 중에 조정 국가대표 출신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뱃사공에게 물어보니 자신은 아니란다. 호수가 잔잔하고 워낙 경치가 아름다워 세계 조정 선수권 대회가 자주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고요함 속에 잠겨 맑은 호수에 가득한 하늘과 산과 숲을 음미하노라면 정말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따로 없다. 건너편 바위 절벽에 걸터앉은 블레드성과 트리글라브산 허리에 결쳐진 구름. 배 위에서 보는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호숫가 호텔 빌라 블레드는 한때 유고 연방 대통령 티토의 개인 별장이었다. 정상 회의 때 초대받은 김일성이 이곳 풍광에 반하여 여기서 2주간이나 숙박했다고 전해진다. 호반에 서면 티토는 물론, 제정 오스트리아와 유고슬라비아의 왕족들이 왜 이곳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배가 들어가는 블레드 섬 선착장에는 젊은 청춘들이 선착장에서 수영을 하거나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선탠을 즐기고 있다. 섬은 그 생김새가 빼어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15세기에 지어진 성모 마리아 교회, 일명 성모 승천 성당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다.

 




슬로베니아 전통적인 결혼식에서는 신랑이 신부를 안은 채로 99계단을 올라서 성당에 있는 '소원의 종'을 울리면 혼례가 이루어지는 한편의 드라마 같은 풍습이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로맨틱스러운 혼례를 치르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많은 연인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세계의 숱한 연인들을 유혹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풍경이다.

 


성모 승천 교회 내부는 1470년에 제작된 고딕 양식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가구들이 보존되어 있다. 성당 안의 '소원의 종'. 여행객들이 성모승천성당의 명물인 소원의 종을 쳐보려고 기다리고 있다. 종이 울리면 그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기대감으로 순서를 기다리는 지루함까지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이 줄은 힘이 능사가 아니고 오히려 조금씩 반동을 주면서 천천히 잡아당겨야 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맑은 종소리가 종루 꼭대기에서 블레드 호수를 향해 울려 퍼진다.

 

종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전해온다. 성주의 젊은 과부인 플록세나는 사재를 털어 만든 종을 성당에 매달려고 나룻배를 타고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종과 사공이 호수 바닥에 수장된다. 모든 것을 포기한 플록세나는 로마에 가서 수녀가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교황이 종을 달았는데 그때부터 '소원의 종'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소원이 있든 없든 블레드에 오면 누구든지 종을 쳐볼 요량으로 찾아가는 곳이 되었다.

 



동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트리글라브산은 구름이 정상을 가리고 있다.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신()인 트리글라브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 산은 슬로베니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슬로베니아의 국기와 국장, 그리고 50센트짜리 동전에까지 사용되고 있다.

 

집 사람과 함께 블레드섬 산책길을 따라 돈다. 느린 걸음으로 그 풍경들을 두 눈에 담는다. 뜨겁게 쏟아지는 햇살에도 어쩐지 한가로운 봄 곁에 선 듯한 이 기분. 오래된 것들 곁에 서면 마음도 그렇게 시간을 되돌리나 보다. 주변에 서있는 초목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향기가 진하다. 오늘처럼 이런 길을 걸으면 마음이 열리지 않을 이, 행복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


섬을 한 바퀴 도는데 느긋한 걸음으로도 30분이면 족하다. 30분 동안 숱한 상념들이 호숫가에 부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살면서 너무나 자주, 너무나 쉽게 잊고 살았던 것들이 떠오른다.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삶의 일상. 잊고 살았던 기본적인 것들이 가장 의미 있고 멋진 일임을 섬을 돌면서 깨닫는다. 그런데 깨달으면 무엇 하리. 금방 잊게 되는데.

 




짧은 산책을 뒤로 하고 플레타나가 기다리는 부두로 발걸음을 돌린다. 멀리 높게 솟은 줄리안 알프스의 산등성이와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 하얀 층적운이 데칼코마니처럼 비친 수면 위로 잔잔한 물결이 일렁인다. 그 멈춘 듯 흐르는 호숫물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을 맴돌던 잡념도 물길 따라 둥둥 떠내려간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7.28 09:05 수정 2019.07.2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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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