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의 인문학여행] 상원사 가는 길

치유의 숲

김용필

눈이 오는 5월 중순,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상원사로 가고 있었다. 그곳 전나무 숲은 나의 아픔을 치유했던 비밀의 정원이었다. 동안 벼르고 소망하며 오랜만에 찾아온 오대산 산상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5월의 눈은 특이한 변절이었다. 계곡은 연초록 잎새가 찬란한 빛을 발산하고 골짜기마다 음색이 다른 화음의 물소리에 춤을 추며 합류하고 있었다. 

 

연록의 낙원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창연하게 잎새의 무도를 벌이고 산곡에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도 춤을 추고 있었다. 천년의 질곡을 온몸에 안고 하늘 높이 치솟은 전나무가 고고한 위상으로 나를 반긴다. 숲의 정령, 전나무 앞에서 위대한 수령의 위풍에 고개가 숙어진다. 숲은 희망이고 생명이며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는 마력을 가졌다.

 

상원사, 문수보살 길에서 적멸보궁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은 위대한 수령의 품위와 진정한 생명의 향유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하늘 끝 높이 치솟아 자란 전나무는 숲은 기록 없는 역사의 증언이었다. 500년 전나무 수령 앞에 인간의 덧없는 야망이 무력해진다. 뭐가 잘났다고 날뛰며 뭘 쟁취했다고 자만하는가. 500년 연륜의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선 그 같은 영화와 역사는 순간에 불가하다. 

 

오로지 한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버티고 묵묵히 서서 철없이 날뛰는 무리의 수난사와 인간의 허무한 욕망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만하지 말고 허풍 떨지 말고 네가 선 자리를 뒤돌아보면서 꿋꿋하게 나가라. 지난 시절이 한갓 부질없는 욕망일지라도 자탄하지 말고 눈 앞의 것이 부족하다고 먼눈 밖의 것을 탐하지 말라. 작다고 불평하지 말고 가진 것을 소중하게 여겨라. 현상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분노하지 말고 묵묵히 서 있으면 언제나 새롭고 빛난 영화는 오는 것이다. 상원사 전나무 숲에서 느끼고 깨달은 사색이었다. 

 

상원사 전나무 길은 내 안의 분노와 고통을 치유하는 기적을 낳아주었다. 내가 그 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뇌하고 울부짖었던가. 그러나 숲은 내 안의 슬픔과 고통을 말끔히 치유해 주었다. 그 길에서 분노하고 슬퍼하고 좌절하면 주저앉았을 때 전나무 정령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인생을 얼마나 살았다고 슬픔에 좌절하는가? 난 너 같은 나이를 열 배 이상 살았어도 너처럼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보라, 오직 한곳 땅에 뿌리박고 하늘만 바라보며 그나마 따스한 햇볕과 바람에 의지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허지만 이렇게 올곧게 키 큰 나무로 하늘을 우러러 존경하는 거목으로 자랐다. 두 팔 벌려 내 몸을 안아보라, 네 팔 안에 있는 내 몸을 가슴으로 느껴보라. 흙에서 솟는 열기가 풍상 거친 세월에 시달린 너의 아픔을 편안하게 안정시킬 것이다. 내 몸에 기대여 숨을 쉬어라. 난 너의 힘이 될 것이다. 아, 당신의 위대한 베풂에 머리 숙여 존경합니다. 당신은 내 인생의 기로이고 멘토이며 기적입니다. 

 

상원사 전나무 숲에서 잃어버린 시간의 아픈 추억을 회상하며 숲길을 걷는다. 그때 40대 초반, 5월의 어느 날, 세상을 슬픔을 가득 안고 적멸보궁을 지나 비로봉을 오르고 있었다. 산악 동호인들은 사픈사픈 산을 오르는데 나는 숨 가쁘게 오르고 있었다. 숨이 차서 주저앉아 있는데 앞서가던 산우가 되돌아와서 말을 건넨다.

 

“힘드세요?”

“네. 숨이 차고 힘들어 못 오르겠어요.” 

“어쩌나. 먼 길을 가야 하는데.... 쉬엄쉬엄 가세요.”

“쉬면 괜찮겠지요?”

“그래요. 쉬었다가 천천히 오세요.”  

 

산우는 앞서가고 있었다. 산행코스는 상원사에서 시작, 적멸보궁을 지나 비로봉(주봉1563m) 상왕봉. 두로봉에서 빽하여 북대 미륵암으로 내려 상원사로 돌아오는 5km 5시간 산행이었다. 겨우 한 시간여 와서 생긴 일이지만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없었다. 등산에 초보인 내가 전문 산악인 속에 낀 것이 문제였다. 그때 누군가가 한마디 던졌다.

 

“제가 천천히 보행해 드릴게요.” 앞서가던 산우가 되돌아 내려와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힘든 모습을 보고 갈 수가 없었어요.” 

 

나는 산우가 주는 청심환을 먹고 도움을 받으며 비로봉에 올랐다. 오대산(1563m) 정상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힘이 생겼다. 대원들은 벌써 가고 없었다. 이제부터는 완만한 평원길이다. 상왕봉에서 두루봉까지 올라 다시 내려 북대 미륵암으로 왔다. 산우는 끝까지 나를 보살펴 주었다. 가냘픈 몸인데도 산을 오르는 힘은 장사였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분이 있을까.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순수하다지만 자기 몸도 힘든데 남을 위하여 험악한 오대산을 5시간 같이 해준 산우의 마음은 천사 이상 부처였다. 두루봉에서 내리는 산곡에 푸른 전나무 숲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 있었다. 나무의 위력에 눌린 내 모습이 더욱 무력해졌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전나무 군락이랍니다.”

“자주 오시나요?”

“3번째인데 우렁찬 기상의 전나무 숲이 좋아서 온답니다.”

“산을 좋아하시나 봐요?”

“네. 좋아하게 됐어요. 오대산 전나무 숲이 유혹했어요.”

 

산우는 한참 전나무 숲을 바라보고 숲의 명상에 젖었다. 나도 숲을 바라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전나무 숲이 주는 마력 같은 명상이었다. 사이프러스처럼 전나무는 하늘만 보고 자란다. 오롯이 세상의 부잡한 것들은 떨치고 하늘을 향하여 곧은줄기를 뻗치는 나무였다. 언제나 푸른 빛으로 지상의 어지러운 것들과 멀리하고 하늘만 바라보는 나무였다. 숲의 사색, 산우는 숲의 혼에 빠져버렸다. 나도 잠시 전나무 숲의 위상에 눌려 버렸다.

 

“오늘 산행은 산우님 덕분에 무사히 마침을 감사드립니다.” 

“슬픔이 있나 봐요.” 

“동생을 잃었습니다.” 

“동병상련의 아픔이 있었군요. 전,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이혼녀랍니다.”

 

어느덧 우린 솔직한 자신의 심경을 말하고 있었다. 

 

“아픈 가슴을 안고 있었군요.”

“나도 한때는 그랬어요. 산에 오니까 잊히더군요. 자주 나오세요.”

“당신은 천사 같습니다. 부처님을 닮은 천사요.”

“내 생각이 나서 도운 것뿐입니다.”

 

상원사 등산을 마치고 동호인 버스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미선, 그녀는 이름과 연락처를 넘겨주었다. 그 후 그녀가 산에 갈 때 전화를 하였다. 그렇게 위안을 받으면 6개월여 산행을 같이하였다. 그 후 소식이 끊겼고 난 4년에 걸쳐 산행에 열중한 결과 전국의 100대 명산을 다 돌아볼 만큼 산을 좋아하는 마니아가 되었다. 산에 올라 세상을 보는 기분은 과히 신선이 된다. 힘들게 돌아올 산을 왜 오르는가. 정상을 정복한 쾌유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의 말이다. 

 

산에 오르면 세상을 정복한 쾌감에 젖는다. 산은 인생의 스승이며 성자다. 성인 같은 산에서 인생을 배우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여유와 배려하는 마음을 배운다. 산행은 육체와 정신적인 건강을 찾아 주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산에 오르면 세상이 다 아름답게 보이고 사랑하며 감사하는 은혜를 배운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어느 해였다. 김 작가님, 산우 미선입니다. 시간 나면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을 한 번 찾아 주세요. 오늘따라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나는 기억 속의 그녀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지장암 비구니 산사의 스님이 되었다. 

 

“스님이 되셨군요.”

“네. 그때 전나무 길에서 결심했습니다. 내 길은 이 길이로다.”

“그랬군요. 그동안 소식을 몰라 궁금했습니다.”

 

스님은 따뜻한 칙차를 내놓았다.

 

“마시세요. 가슴이 따스워질 것입니다.”

 

난 한숨에 들이마셨다. 차갑던 속이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뱃속이 따뜻해졌습니다.”

 

난 스님의 해맑고 깨끗한 표정을 쳐다보았다. 그때 절망과 슬픔과 죽음의 공포에 젖어 울부짖던 모습이 떠올랐다. 삶에 지쳐 산을 찾았고 고산준령을 헤매고 다니며 방황하였다. ‘미스터킴, 전 말이에요. 살아갈 용기가 없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절망의 고통에 시달림을 위로받으려고 산을 찾았다. 남편의 외도는 그녀에게 이혼녀라는 슬픔을 안겨 주었다. ‘잊으려고 산행을 다니는데 쉽지가 않네요.’ ‘미선 선생님. 저도 선생님 같은 슬픔이 있어요. 동생이 40세에 갔어요. 그 슬픔이 나를 힘들게 한답니다.’ ‘잊으세요. 털어버리세요.’ ‘그래요. 우리 같이 용길 내요.’ 그렇게 우린 전나무 숲에서 서로를 위쪽으로 하였다. 

 

그때 그녀는 세상의 온갖 슬픔을 껴안은 모습으로 상원사 전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셔요? 부처님을 만났어요.’ 죽음에 이루는 절망의 모습으로 키 높은 전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사색을 끝내고 밝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나무 끝에 앉은 부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10년 후 만난 그녀는 스님이 되었다. 절망의 시기에 방황하던 여인의 처절한 모습에서 벗어나 사랑과 자비에 가득한 행복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그렇게 난 자주 오대산 월정사에 와서 미선 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5대 암자를 둘러보며 잃어버린 자아를 더듬고 있었다. 오대산은 5개 암자가 있는 선원 터를 말한다. 월정사에서 상원사 문수보살 길에서 적멸보궁을 돌아 비로봉의 사자암에서 비로자나불상에 기도하고 다시 염불암(수정암) 서대에서 한강의 발원 샘, 무통수를 마시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다시 발길은 두로봉 북대의 미륵암에서 나옹선사의 16 나한상을 맞으며 감로수를 마신다. 발길은 월정사 본찰인 만월산 동대의 관음암에서 청계수를 마신다. 그리고 호령산 지장암에 들러 총명수를 마시고 비구니 암자에서 미선 스님의 이야길 듣곤 하였다. 그리고 다시 지장암을 찾았을 때 그녀는 없었다. 미선 스님은 다른 절로 떠났다는데 행적을 알 수가 없었다.

 

10년이 지난 후 오늘 다시 상원사를 찾아와서 수령 높은 전나무 숲을 거닐면 미선 스님을 생각하며 지난날 방황하고 번민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 미선 스님을 떠올린다. 어디에선가 잘 계시겠지. 전나무가 나를 바라본다. 난 정중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춘다. 존경합니다.

 

월정사 전나무 숲은 내게 치유의 기적을 낳은 정원이다. 이 신비로운 기운의 뻗치는 치유의 정원을 다시 걷는 행복에 젖었다. 70년 인생을 살아온 희로애락이 500년 전나무 앞에선 무색하지만 나름의 곧게 살아온 세월의 환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다. 나무에서 삶의 가치를 배운다. 

 

오롯이 한곳에서 풍상 거친 세월을 감수하며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는 나무를 보라. 그 존재만으로 존경스러운데 그 어떤 고난도 불만도 표현하지 않는 고고함이 자랑스럽다. 전나무 숲에서 다시 인생을 고찰할 때 위대한 존재의 가치를 느낀다. 그리고 더불어 사랑하고 베푸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

이메일 :danmoon@hanmail.net

 

작성 2024.05.27 12:04 수정 2024.05.27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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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