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7년 문예중앙에 발표되었던 박완서(1931~2011)의 단편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는 작품으로 전쟁 중 여성의 삶, 특히 노년의 나이에 이른 여성의 삶을 관조하고 있다. ‘할미꽃’이 제목에서 들어가 있듯 소설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하는 두 개의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는 ‘달래마을’이라는 어느 농촌에서 일어난 일이다. 마을 청년들은 국군 또는 인민군으로 전쟁터로 나가고 젖먹이 빼곤 여자들만 남아 있는 상황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반목하여 빨갱이도 되고 반동이 되기도 했는데 그 중심은 마을의 분교건물을 점령한 주인이 국군이냐 인민군이냐에 따라 달라졌다. 그러나 마을에 여자들만 남게 되자 사람을 죽이거나 끌고 가는 일은 더 이앙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날 ‘분교건물’의 주인이 국군도 인민군도 아닌 양코배기란 소문이 돈다. 그리고 양코배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마을을 기웃거리며 여자들만 눈에 띄면 이상한 몸짓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여자들은 기겁하고 도망친다. 미군들이 양색시를 찾는데, 산골 마을에 그런 여성들이 있을 까닭이 없다. 밤이 되자 미군들은 계속 고성을 지르며 다녔고 여자들은 공포감에 그 마을에서 제일 웃어른이 되는 노파가 살고 있는 큰 집으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여자들은 강제로 양코배기들에게 당할지 봐 두려움 속에 몸을 떨곤 차라리 이럴 바엔 죽기를 자청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파가 양코배기들의 색시 노릇을 대신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선다. 새댁들과 처녀들은 주책이라고 떠들지만 노파는 위엄을 지니고, 손녀인 옥희에게 화장품을 가져오라고 한다. 너희들이 양코배기들의 얼굴을 보면 나이 분간이 잘 안되듯이 그들도 우리를 보면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새댁에게 화장을 맡긴다.
드디어 노파의 화장은 완성되고, 대문이 열리고 거구의 양코배기가 들어서서 예쁜 색시로 분장한 노파를 번쩍 안고 지프차를 타고 가버렸다. 분교건물에 들어서자, 노파는 침대로 내팽개쳐지고, 대여섯 명의 미군들이 있었다. 누군가가 노파를 일으키고 옷을 주워 주고 양코배기들은 노파를 지프차에 태워서 먹을 것을 상자에 담아 큰 집으로 돌려보냈다. 노파는 집으로 돌아와서 맛있는 것이 가득 든 상자를 꺼내놓고 젊은 여자들 앞에서 곧 위엄을 회복하고 자기가 방금 겪은 모험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전쟁에서 “숫총각이 전사하는 확률이 많다”는 풍문이 나오는 데서 시작이다. 숫총각 병사들은 이 소문을 듣고 불안감에 휩싸이고, 이를 간파한 중대장은 한 시간 정도의 외출을 허락한다. 숫총각 김 일병은 어느 작고 초라한 집을 밀고 들어섰다. 그 집에는 외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노파가 홀로 살고 있었다. 김 일병은 노파와 대화하면서 친근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군대에 오기 전에 시골에 두고 온 애인인 혜숙의 이야기부터 숫총각이 제일 먼저 총알을 맞는다는 풍문까지 모두 이야기한다. 김 일병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니까 그 노파는 총각을 면하고 가고 싶지 않냐고 다정스레 묻는다.
김 일병은 기겁하지만, 할머니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할머니는 어서 불을 끄자며 자기는 아직 정정하다고 김 일병을 안심시키고 어둠 속에서 여자가 되어 있었다. 김 일병은 급기야 숫총각을 면하게 되고, 다음에 또 오라는 노파의 말을 뒤로 하고 그녀에게 불결한 혐오감을 느낀다. 숫총각을 면한 덕분인지 김 일병은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제대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애인 혜숙은 이미 시집을 가버렸다.
김 일병은 혜숙이의 배신과 노파의 ‘또 와요’라고 말하던 표정을 떠올리며 여자들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잠시 방탕한 생활도 하지만 참한 여자를 맞이하여 자식도 낳고 잘살게 된다. 시간은 흐르고 오십을 바라보는 김 사장이 된 김 일병은 젊은 날에 관계를 맺은 그 노파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변해간다. 자식과 같은 남자와 적극적인 육체관계를 맺은 것은 성적인 탐닉이 아니라 이상한 풍문으로 불안해하던 그에게 헌신적인 모성을 베풀어 준 것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젠더로서의 여성을 할머니보다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여성으로써의 존재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나는 여성의 위대함이나 페미니즘의 방향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해석하고 싶다. 모든 위정자들의 마음이 국민을 향해서 작품의 두 할머니 같은 마음이었으면 한다. 젊은 처자 들을 위해 대표로 나서서 자신을 희생한 할머니, 전쟁터에서 꼭 살아남으라고 김 일병에게 믿음과 희망을 준 할머니.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출세를 위해 국민의 간절한 희망을 역이용하는 비열한 일부 위정자들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민병식]
시인,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현)대한시문학협회 경기지회장
현)신정문학회 수필 등단 심사위원
2019 강건문화뉴스 올해의 작가상
2020 코스미안상 인문학칼럼 우수상
2021 남명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상
2022 신정문학상 수필 부문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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