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진 칼럼] 이제, ‘나’로 살기

허정진

나이가 들어 은퇴하였다. 더 이상 공식적인 직업도 없고, 그물망 같던 사회적 관계에서도 한 발짝 물러났다. 목표지향적 노동이 없으니 삶의 수고와 고통도 한층 덜해진 것 같다. 시골로 귀향하여 자연을 즐기며 욕심 없이 산다. 은퇴했다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다 쓴 사람 마냥 무료와 권태로 여생을 보낼 수는 없다. 남은 과제는 홀로서기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도 있지만 ‘걸어온 길’에 대한 후회도 없다. 잘 살았는지 못살았는지에 대한 평가도 ‘열심히 살았다.’라는 말로 치부해 둔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평생의 과제였지만 성에 낀 유리창처럼 선명하게 보이지도 않고 또렷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분명히 있었다. 상남자 같은 배짱이 없어서 그저 남들 살아가는 것처럼 안정감과 확실함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영웅담과 성공드라마가 주된 관심사였다.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야심으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목표와 성과를 이루어 내야 했다. 경쟁을 통해 과연 누가 살아남느냐의 문제였다. 살아온 모든 일이 비교를 넘어 경쟁 아닌 일이 없었고,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을 정당화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진정한 성공도, 행복도 아니었다. 나의 꿈과 낭만이 배제된 성취는 한낱 허깨비 놀음에 불과했다.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삶도 아니었다. 향기 없는 꽃이거나 그늘 없는 나무나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남을 흡족하게 할 수는 있어도 자신을 흡족하게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이 만족스럽기는 해도 그리 흡족하지 않은 이유는 타인의 기준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최인철 교수의 조언처럼.

 

이제 ‘내가 아닌 나’로 살아온 삶의 굴레를 벗어나야 할 때다. 소유나 집착이 아닌 존재에 대한 사랑, 세상 사람들이 정해준 답에서 벗어나 자신이 선택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다. 노자의 말처럼 이제 ‘바람직한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좋은 일’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 기회가 온 것이다. 남의 정해준 기준이 아니라 내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얼마나 자유롭고, 즐겁고 또 신비로운 실험이 될까?

 

남에게 사랑받고 미움받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거나 뭘 맞춰 준다는 생각도 하지 않으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부러워하거나 시샘, 질투할 일도 없다. 누구의 명령을 받들거나 어떤 의무에 구속당하지도 않는다. 누구에게 휘둘리거나, 아무 곳에나 함부로 뿌리내려야 했던 아픔도 더 이상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다 보면 저절로 삶이 자유롭고 여유로워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을 위해서는 자기 발견의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시간과 노동에서 벗어났다고 내 멋대로 하는 삶이 아니다. 행복할 것만 같았던 은퇴가 뜻밖에 무기력한 자유, 무의미한 시간으로 실망하게 되는 것도 자기를 찾는 과정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나를 가슴 뛰게 하는지, 언제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 있는지 진정한 자아의 세계로 귀의하는 일이다.

 

이제 더 이상 자존심을 내세울 것도 없다. 남과 비교할 일도 없고, 비교해서 느끼는 우월감은 진정한 행복도 아닐 것이다. 자존심을 포기하는 대신 자존감을 얻는 방법을 택해야겠다. 남과의 관계에서 상대적 만족보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보람이 더 중요할 것이다. 자존심은 남과의 비교우위를 통해 달성할 수 있지만 자존감은 내면의 질,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채우는 일이다. 자신의 중심이 단전에 잘 놓여있는 진중함과 기품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 

 

앞으로의 시간은 나를 위한 것이다. 겉이 아니라 속을 들여다보는 시간,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중심을 둔 시간이다. 자유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명제로 삼는다. 옳고 그름의 지혜보다 좋고 나쁨의 감정으로 단순해지려 한다. ‘왜?’냐고 더 이상 묻지 않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물 흐르듯 하루를 보내겠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모든 일을 쉽고, 간단하고, 그리고 천천히 살려고 한다.

 

내 행복은 내가 책임지어야겠다. ‘나 자신에 주목하고 내 삶에 예술가가 돼라.’라는 말이 있다. 무엇으로 행복할지,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삶이 될지 사람마다 가치관이나 성향에 따라 다르다. 나의 성(城)은 크고 화려한 것도 아니고, 남에게 보여주거나 남을 위해서 준비된 것도 아니다. 눈치 보거나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남으로 인해 불편해질 필요도 없다. 나에게 편안하고 풍요로운 시간이면 충분하다. 천하의 사물에는 본바탕이 있으며, 이러한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혀서 살아온 삶은 이제 그만하면 됐다. 세상에는 벌과 개미만 사는 게 아니라 나비나 베짱이도 있는 법, 그들이 남들 눈에는 배울 점이 없을지 몰라도 세상에 해를 끼치는 생명은 결코 아니다. 풍각쟁이면 어떻고,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면 또 어떤가. 세상 물정 어두운 간서치(看書癡)면 어쩌랴. 얼굴만 반지르르한 기름기보다 차라리 서권기가 낫지 않을까. 내게 어울리고 행복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사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해마다 신년 첫날, 동해안 일출을 마다하고 왜 나는 서해안 노을을 보러 갔을까? 조용하고 쓸쓸한 것을 좋아하는 낭만적 슬픔, 불편함을 거리낌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은자(隱者)적 오기, 고독과 외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겁 없는 오만이 내 삶의 지워지지 않는 의문점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시간여행을 떠난다면 내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4.06.25 10:35 수정 2024.06.2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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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