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 칼럼] 나도 원園이다

김태식

모든 사람들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불리는 이름이 있다. 호적에 정식으로 등재되는 이름과 달리 동네에서 아니면 집안에서 친척들만 아는 아명이라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개똥이’ 혹은 ‘복실이’ 등이다. 이것은 집안의 어르신들이 천한 이름을 불러 줌으로써 건강하게 자란다는 속설에서 붙여 준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반면에 문인은 물론이고 화가나 예술가들에게는 아호라는 것이 있기도 하다. 자신의 본명을 잠시 접어두고 본인이 하는 일과 잘 어울리는 이름을 대중들에게 내놓는 것이다. 아주 절친한 친구들끼리 서로의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불러 주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문인들이나 예술가들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아호나 예명을 가진 분들도 많고 본명보다 아호가 더 잘 알려진 경우도 간혹 있다. 

 

얼마 전, 어느 지인으로부터 본인이 쓴 글을 엮어 펴 낸 한 권의 책을 받았는데 자신의 소개란에 아호가 ‘취원’翠園으로 되어 있었다. 그 아호를 보는 순간 나는 또 한 사람의 원園이 탄생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고 짐짓 놀랐다. 더군다나 평소 자신이 아호를 갖고 있다는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호의 끝 자에 ‘원’이 붙는 예술가 몇 사람이 있다. 조선시대의 유명한 화가를 꼽으라면 한두 명이 아니겠지만 풍속도로 유명한 김홍도와 신윤복을 빼 놓을 수 없다. 김홍도의 아호는 단원檀園이다. 박달나무 ‘단’檀에 동산 ‘원’園이다. 이에 맞추어 그의 제자인 신윤복은 스승의 아호를 따서 혜원蕙園이라 지었다. 풀이름 ‘혜’蕙에 동산 ‘원’園이다.  

 

그런데 이 두 화가들이 활동하던 시절을 뒤로 하고 약 백년이 지난 후에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지만 선천적으로 소질을 타고난 천재화가 한 명이 나타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장승업이다. 그는 천민으로 살면서 엘리트 무대에 서지는 못하고 야인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림 실력만은 당대의 화단을 평정할 정도였다. 장승업은 조선 후기 남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김홍도, 신윤복(혹은 안견)과 더불어 조선 화단의 3대 거장으로 불린다. 

 

양반 출신의 화가와 어울릴 수 있는 유명한 자리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본인의 실력은 자신이 인정한다고 자부하면서 아호를 갖고 싶었다. 어떤 아호를 가질까 하고 고민하던 그는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고, 평소 존경하던 ‘단원’과 ‘혜원’의 아호를 생각했다. 워낙 유명한 분들이라 그들의 아호를 흉내 내어 아호를 짓게 되는데 바로 ‘오원’吾園이다. 나 ‘오’吾에 동산 ‘원’園이다. 

 

이를테면 단원과 혜원이 유명한 것은 백성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분들의 아호에는 공통으로 ‘원’이 들어간다. 아울러 이제부터 나도 ‘원’이니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는 뜻이다. 참으로 재미있고 재치 넘치는 아호다. 

 

취원翠園이라!

 

책을 펴낸 작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터인지라 금세 느낌이 떠오른다. 푸를 ‘취’翠에 동산 ‘원’園이니 푸르른 동산에서 물을 들이고, 자연 염색을 하면서 즐긴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형형색색으로 자연염색을 물들이니 아름답고 활기 넘치는 동산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아호에 ‘취’翠를 썼다는 것은 작명을 해주신 분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듯하다.  

 

또한 ‘취’는 푸르름은 물론이고 밝고 구김살 없는 삶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생기발랄함도 있고 인생의 활력소를 불어 넣는다는 뜻을 갖고 있기도 하다. 덧붙여 ‘취’는 ‘비취색’翡翠色을 떠 올리게 한다. 비취옥의 빛깔과 곱고 짙은 푸른색을 가리키는 말이니 이 얼마나 고운 연상인가? 고려청자의 색깔을 표현 할 때도 비취색의 오묘함을 말한다. 단순하고 선명한 푸른빛이 아니라 보일 듯 말 듯 하게 적당히 감추어진 절제된 빛깔이야말로 아름다움의 결정체이다. 

 

이 밖에도 ‘취’와 연관되는 단어들은 아름다움 일색이다. 반투명체로 된 짙은 푸른색의 윤이 나는 구슬을 ‘비취옥’이라 한다. 비취반지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상상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따로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원’園은 또 어떠한가? 동산은 옛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단어이다. 어릴 적 시골의 고향마을에는 언제나 앞동산이 있었는가 하면 뒷동산이 있었다. 동네 조무래기들의 놀이터였다. 그래서 동산은 넉넉함이 있고, 감싸주는 포근함도 같이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뜻을 가진 ‘취’를 택하고, 넉넉한 ‘원’을 붙여 스승이 아호를 지어 제자에게 주었다고 하니 아름다운 아호가 아닐 수 없다. 부럽기만 할 뿐이다.

 

 

[김태식]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온마음재가센터 사회복지사(현)

울산신문 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해양문학상 논픽션 소설 당선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 wavekts@hanmail.net

 

작성 2024.07.16 11:18 수정 2024.07.1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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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