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충 칼럼] 남미 축구, 왜 강한가

최연충

2024년 7월의 지구촌은 온통 축구 열풍에 휩싸였다. 유럽에선 17회째를 맞는 <Euro 24>가 열렸고, 동시에 미국에서는 남미지역 월드컵 격인 <Copa America 2024>가 펼쳐졌다. 세계 축구팬의 눈길은 Euro 24에 더 쏠렸을지 모르겠으나, 대회의 열기만큼은 Copa America 2024도 결코 이에 뒤지지 않았다. 한편 시간을 거슬러가 보면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유럽과 남미를 대표하는 양웅(兩雄)이 맞붙은 결승전은 그야말로 역대급 드라마였다.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와 음바페를 앞세운 프랑스, 격전 끝에 아르헨 티나가 우승컵을 들어올렸지만 사실 초박빙의 승부였다. 

 

요컨대 세계 축구 판도는 오랫동안 유럽과 남미가 양분해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럽은 축구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영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이 톱클래스의 프로 리그를 운용하면서 탄탄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면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쓸어모으고 있으니 강할 수밖에 없다. 반면 남미의 여건은 여러모로 유럽에 비해 턱없이 열악하다. 그럼에도 남미 축구가 전혀 유럽에 밀리지 않고 강세를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제 남미 축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서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축구가 유럽 권역을 넘어 지구촌 전체를 아우르는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게 된 연원을 살펴보면, 그 결정적인 계기는 1930년 월드컵 대회의 창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겨우 100년 남짓한 기간에 단일 종목 스포츠가 올림픽까지 능가할 만큼 이렇게 급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비유럽 지역의 축구 실력이 향상되어 유럽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면서 전세계 팬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어모은 것이 가장 큰 동인(動因)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는 남미 국가들의 기여가 매우 컸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3국의 활약이 돋보인다. 

 

1921년 제3대 FIFA 회장에 취임한 쥘리메(Jules Rimet,프랑스)는 올림픽에 버금가는 세계축구대회 창설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여 마침내 1930년 첫 월드컵 대회 개최를 성사시킨다. 당시 세계 축구 최강으로 꼽히던 나라는 1924년과 1928년 올림픽을 연이어 제패했던 우루과이였다. 마침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가적 이벤트를 모색하고 있던 우루과이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첫 월드컵 개최지로 확정되었고, 유럽 4개국(프랑스, 벨기에, 유고, 루마니아)과 남미 7개국, 북미 2개국(미국, 멕시코)이 참가하여 세계대회의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유럽팀들은 장거리 배편 이동으로 인한 피로가 겹쳤던 때문인지 모두 초반에 탈락하고 남미의 이웃 국가인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맞붙었다. 메인스타디움인 센테나리오 경기장(Estadio Centenario)에서 치러진 결승전에서 우루과이가 4:2로 승리하여 처음으로 쥘리메컵을 들어 올렸다.

제1회 대회에는 유럽의 강호들이 대부분 불참한 점을 들어 우루과이의 우승을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있지만, 첫 월드컵 우승국이라는 상징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보다도 당시 우루과이는 실력 면에서 세계 최강이었다.

 

1934년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제2회 월드컵에는 16개 팀이 참가하였고, 결승전에서 이탈리아가 체코를 2:1로 누르고 우승하였다. 하지만 이 대회에는 당시까지 여전히 세계 최강 실력이었던 우루과이가 불참하였고 아르헨티나도 2진 선수들을 출전 시키는 바람에 대회의 격이 많이 떨어졌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체제 선전용 대회에 불과했다는 혹평까지 받았다. 1938년 제3회 대회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월드컵은 1950년에 와서야 다시 열린다. 제4회 대회 개최국은 브라질이다.

 

브라질은 메인스타디움으로 쓰일 마라카낭 경기장을 신축하는 등 대회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라카낭은 8만 명(입석을 포함할 경우 2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경기장이었다. 그때는 브라질이 세계 최강이라고 평가받고 있었으니 개최국 프리미엄까지 얻게 된 브라질이 우승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리그전으로 치러진 4강전에서 브라질은 스웨덴을 7:1로, 스페인을 6:1로 대파하였다. 마지막 경기 상대는 우루과이.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2:2로 비기고 스웨덴에 3:2로 신승하여 겨우 1승 1무를 기록한 터라 객관적으로 두 팀의 전력 차이는 커 보였다. 역사에 남게 된 그날, 7월 16일 열린 결선리그 마지막 경기에는 마라카낭에 17만 관중이 들어찼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브라질은 전반 내내 파상공세를 펼쳤지만 우루과이의 탄탄한 수비에 막혀 득점하지 못했다. 후반 2분에 드디어 브라질의 선취골이 터졌다. 경기장은 환호와 함성으로 터져나갈 듯했다. 이제 그 누구도 브라질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후반 21분 우루과이가 동점골을 넣으며 따라붙더니 급기야 후반 34분에는 알시데스 기지아(Alcides Ghiggia)가 역전골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순간 마라카낭에는 깊은 정적이 흘렀다. 경기를 직접 참관했던 쥘리메 회장은 이를 “소름 끼치는 적막감”이라고 표현했다. 

 

그날 경기가 브라질의 패배로 끝나자 현장에서 두 명이 권총을 쏘아 자살했고, 10만명 이상의 관중이 경기장을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밤새 통곡을 했다고 한다. 우루과이 선수들은 분위기에 질려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쥘리메컵만 안고서 도망치듯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남미 축구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3국의 각축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제1회 월드컵에서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맞붙었다. 월드컵 첫 우승을 우루과이에 내준 아르헨티나는 울분을 삭힐 수 없었다. 분노한 팬들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재 우루과이 대사관으로 몰려가 대사관 건물을 부수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를 진정시켜야 할 아르헨티나 정부는 오히려 한술 더 떠서 1년간 우루과이와 단교를 선언해버렸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도 축구에서는 둘도 없는 앙숙이다. 아르헨티나는 제4회 월드컵 개최지가 브라질로 결정되자 불만을 터뜨리며 아예 불참해 버렸다. 그에 앞서 1946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렸던 코파아메리카 대회 결승전에서는 아르헨 티나가 브라질을 2:0으로 누르고 우승했지만, 그 경기는 초유의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며 난장판이 되었다. 이후 10년간 두 나라는 대표팀간 시합을 갖지 않았다. 

 

우루과이와 브라질 관계가 견원지간임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마라카낭의 비극 이후 오늘날까지 우루과이는 브라질에게 증오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브라질 선수들은 어떤 대회에서든 우루과이를 만나게 되면“우승은 못하더라도 우루 과이만큼은 반드시 잡는다”는 결의를 다지며 이를 악물고 뛴다. 우루과이 역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는 사력을 다한다. 그만큼 두 팀의 경기는 언제나 격렬하다. 이번 <Copa America 2024>에서도 두 팀은 8강에서 맞붙었는데, 거친 몸싸움이 이어지면서 결국 우루과이 선수 1명이 퇴장당했다. 그러고도 연장전까지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승부차기 끝에 우루과이가 또 이겼다. 브라질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런 3국 간의 라이벌 의식과 팬들의 열정·광기가 동반상승 효과를 내면서 남미 축구를 강하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월드컵과 코파아메리카 우승 기록을 보면 이 3국이 물고 물리면서 얼마나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는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월드컵의 경우 지금까지 총 22회 대회를 치르는 동안 브라질(5회), 아르헨티나 (3회), 우루과이(2회) 3국이 합쳐서 10차례나 우승을 기록했다. 

 

이탈리아(4회), 독일 (4회) 등 유럽 국가가 나머지 12회를 우승했으니 유럽과 남미가 거의 반씩 우승을 나눠가진 셈이다. 남미의 다른 나라들은 우승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걸 보면 남미 축구에서 이 3국의 위상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알 수 있다. 남미축구연맹이 주관하는 코파아메리카 대회도 이 3국의 독무대나 다름없다. 1916년 창설 이래 총 47회 대회가 열렸는데,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각각 15회, 브라질이 9회 우승을 차지했다. 나머지 국가들이 우승한 횟수는 다 합쳐도 8회에 불과하다. 

 

이들 3국에 비하면 실력 면에서는 한 수 아래이지만 페루, 칠레, 볼리비아 간의 경쟁의식도 치열하다. 역사적으로 태평양전쟁(1879~1884)을 치르면서 서로 영토를 뺏고 뺏긴 구원(舊怨)까지 겹쳐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유달리 강한 국가간 라이벌 의식이 남미 축구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간 경쟁구도에 더하여 국내 클럽간의 라이벌 관계도 축구 발전에 기여하는 순기능이 크다. 세계 축구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클럽 라이벌이라면 스페인 프리 메라 리가의 명문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를 꼽을 수 있는데, 이 두 팀간의 경기를 일컬어 엘 끌라시꼬(El Clásico)라고 부른다. 

 

남미 3국에도 이에 못지않은 오랜 라이벌 클럽들이 있다. 먼저 우루과이의 경우 뻬냐롤(Peñarol)과 나시오날(Nacional)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양대 클럽으로 군림 하고 있다. 이들의 라이벌전도 엘 끌라시꼬라고 부르는데, 뻬냐롤이 1891년 창단 하고 나시오날이 1899년 창단하여 두 팀 모두 12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으니 굳이 따지자면 우루과이 엘 끌라시꼬가 원조인 셈이다. 최근 조사결과를 보면 우루과이 국민의 46%가 뻬냐롤 팬, 35%가 나시오날 팬으로 나타났다.

 

아르헨티나는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 1905년 창단)와 리버플레이트(River Plate, 1901년 창단)가 숙명의 라이벌이다. 1부리그 우승 횟수가 각각 35회, 37회로 거의 같다. 두 팀간의 경기는 엘 수뻬르끌라시꼬(El Superclásico)라고 칭한다. 

 

브라질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뚜렷한 양강(兩强)이 없는 대신 상파울루州 내의 네 클럽(산투스 FC, 상파울루 FC, SC 코린치안스, 파우메이라스)이 『Big 4』 구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 팀간의 경기를 역시 클라시쿠(Clássico)라고 부른다. 네 팀 중에서는 축구황제 펠레가 17년간 뛰었고 네이마르도 잠시 몸담았던 산투스 FC가 가장 지명도가 높다. 

 

물론 이들 라이벌 클럽간의 과열 경쟁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고 이로 인해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르기도 한다. 이들 명문 라이벌 클럽이 돈과 선수를 쓸어담으니 다른 팀들은 들러리만 서는 형국이 된다. 응원이 격해지면 팬들 간에 난투극이 벌어지고 갈등과 증오가 깊어진다. 하지만 라이벌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경기력이 향상되고 팬들의 관심과 열기 또한 고조되는 효과를 거두고 있음은 분명하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GOAT)는 과연 누구일까?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이다. 그동안 숱한 스타들이 명멸해갔다. 푸스카스, 디 스테파노, 에우제비우, 베켄 바워, 크루이프... 다들 훌륭한 선수들이다. 하지만 1인자까지는 아니다. 딱 한 사람 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펠레, 마라도나, 메시 중 한 명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모두 남미 출신이다. 각각 축구황제, 축구신동, 축구의 신으로 불리고 있다. 

 

펠레는 17세 때인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출전함으로써 최연소 월드컵 출전에 최연소 득점을 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또한 1962년 칠레 월드컵과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도 출전하여 브라질이 쥘리메컵을 영구 소장하는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산투스 FC에서 절정의 기량을 보이던 무렵에는 레알 마드리드, 인터밀란, 유벤 투스 등 유럽 명문클럽에서 거액을 내걸고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브라질 정부가 나서서 그를 국보(國寶)로 지정함으로써 아예 국외 유출을 막아버렸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브라질 축구 그 자체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라도나는 그 펠레가 극찬했던 선수로, 저돌적인 드리블과 현란한 발재간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원맨쇼를 펼치며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었다. 말년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변함없이 그를 추앙한다. 리오넬 메시는 시비의 여지가 없는 현역 최고의 선수, 37세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천재적인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1986년 월드컵이 마라도나의 무대였다면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은 메시의, 메시에 의한, 메시를 위한 대회였다. 

 

세 선수가 활약했던 시기가 다르고 장기(長技)가 다른 데다가 축구가 팀 스포츠라는 점을 감안하면 하나의 잣대로 세 선수의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세 선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빈민가에서 어렵게 유소년 시절을 보냈지만 역경을 딛고 축구를 통해 입신(立身)했다는 점이다. 펠레의 아버지는 준프로 선수였지만 생활비도 못 버는 수준이었고 어린 펠레가 구두닦이를 하며 생계를 도와야 했다. 마라도나와 메시도 부모가 모두 막노동, 청소 등 잡역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하는 형편이었다. 셋 다 가진 것이라고는 천부적인 축구 재능, 그리고 꼭 축구로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집념과 열정뿐이었다. 세 사람 모두 결국 이루어내다. 그것도 세계 최고의 경지에까지.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이나 나라 형편은 어렵다. 한때 세계 5대 부국(富國)으로 꼽혔던 것도, BRICs의 선도국가로 각광받던 것도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남미지역 다른 나라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고 성취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여간해서는 가난이 대물림되는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오로지 축구에 미래를 거는 애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겐 펠레, 마라도나, 메시가 롤모델이다. 다행히 남미권 사람들은 유연성과 순발력이 뛰어나다. 탱고나 삼바춤 추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골목에서든 공터에서든 틈만 나면 늘 공을 갖고 놀다보니 다들 발재간도 좋다. 역설적이지만, 환경이 어렵다 보니 미래의 축구 월드스타들이 우후죽순처럼 계속 자라고 있는 것이다. 

 

남미 축구가 왜 강한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 보았다. 크게 본다면 두 가지 요인 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하나는 뿌리 깊은 라이벌 구도가 빚어내는 동반성장 효과, 다른 하나는 화수분처럼 공급되는 풍부한 축구 인재풀,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소견이다. 우루과이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사람으로서, 남미 축구가 계속 세계 최강의 면모를 보여주기를 바라는 희망도 담겨있다. 

 

 

[최연충]

주우루과이 대사

울산도시공사 사장

現 팬스타그룹 고문

국토교통부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

 

작성 2024.07.19 10:33 수정 2024.07.1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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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