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그리트 뒤라스(1914~1996)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1932년 프랑스로 귀국하여 소르본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 대학 졸업 후, 식민지 담당 부서의 공무원으로 지내다가 1941년에 퇴직, 1943년 유년기 아시아에서의 체험과 가족애를 소재로 한 첫 소설 '철면피들'을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1984년 콩쿠르상을 받은 '연인( L'Amant)'은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수백만 부가 팔렸고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장 콕토 상, 공쿠르상과 파리-헤밍웨이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의 배경은 1929년 프랑스령 베트남이다. 가족과 함께 방학을 보낸 15세 프랑스인 소녀 ‘나’는 기숙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메콩강을 건넌다. ‘나’의 가족은 아버지의 발령에 따라 베트남에서 살고 있다. ‘나’가 어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뜨고 교사인 어머니의 부동산 투자 실패로 가세는 점점 기울어 갔으며 발작과 신경증에 시달리며 주위에 폭언을 일삼고 다녔다. 어머니는 큰오빠를 유달리 편애했지만 큰오빠는 마약과 도박에 가산을 탕진하며 도둑질을 일삼는다. 안하무인격으로 군림하는 큰오빠, 그런 큰오빠에게 늘 시달리는 작은오빠, 그리고 나는 그런 집에서 늘 답답함을 느끼며 살고 있는 소녀였다.
같은 배의 난간에 홀로 기대서서 강물을 바라보는 중국인 남자의 모습은 남성용 중절모와 굽 높은 구두 차림이다. 스물일곱 살의 중국 남자는 베트남의 부동산 백만장자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파리로 유학을 떠났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돌아왔고 매일 매일을 한량처럼 살았다. 강을 건너는 배에서 그 남자는 '나'를 차 안으로 데려갔고 그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시작되었고 그날, 둘은 배에서 우연히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펼치게 된다. 소녀의 모습에서 풍기는 조숙하고 독특한 분위기는 같은 배에 타고 있던 부유한 중국인 청년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후 소녀는 남자의 제안으로 그의 독신자 아파트로 안내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남자와 경험하고 성에 관한 해방감을 느낀다.
식민지의 프랑스인이지만 편모 가정에 경제적으로 한참 힘들었던 소녀는 이 일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젊은 남자의 정부(情婦) 역할을 시작하게 된다. 그들의 관계는 소녀의 학교와 사이공의 프랑스인 사회에도 소문이 났고 결국 소녀는 중국인과 함께 자신의 가족과 식사하기로 한다. 소녀의 가족들은 남자가 식사를 대접했음에도 그 남자가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밥을 먹으면서도 남자에게 한마디도 걸지 않는다.
열여덟 살이 된 소녀는 결국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를 타게 되며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소녀를 태운 채 떠나가는 배 앞에 서 있는 리무진 속의 서른두 살 남자를 바라보며 그를 사랑했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린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프랑스에서 작가로 명성을 얻은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같으며,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영원히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죽는 순간까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
학교의 여자기숙사에서 지내던 주인공은 열 살 이상 많은 남자가 계속 학교 앞으로 찾아오자, 학교에서 창녀로 소문나고 어머니와 오빠 역시 주인공이 중국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질책하고 집안에는 폭력과 폭언이 난무하게 된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매일 밤 남자와 함께 ‘독신남의 방’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고 잠을 잔다. 괴로움으로 점철된 각자의 삶을 뒤로하고 온전히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늘 인식하면서도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같이 시간을 보낸다.
이들의 사랑은 현실도피의 선택일 수 있다. 아버지의 사망, 어머니의 사업 실패, 나오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남자를 진실로 사랑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남는다. 갑자기 몰락한 집의 가난, 어머니의 편애, 큰오빠의 방탕, 작은오빠에 대한 연민 등 어린 소녀가 감당하지 못할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한 탈출구로 소녀는 중국인 남자로부터 경제적으로 후원받으며 사랑받고 싶은 감정을 채워 준 의지할 수 있는 존재 아니었을까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남녀는 서로 상대방의 결핍을 채워 주는 존재였다. 소녀에게는 아버지의 부재, 고통만을 안겨주는 가족과 어머니의 실패한 투자로 인한 가난 등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이 부재했고 중국인 남자에게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독립된 성인으로써의 위치 상실, 중국인으로 백인과 동등하지 못하다는 인종적 계층의 부재가 존재한다. 배에서의 첫 만남 이후로 그들은 매일 서로를 탐한다.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사이임을 알면서도 서로의 외로움과 결핍을 채우기 위해 시작했고 불타올랐지만 결국 이별로 끝난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른 후에 걸려 온 그 중국인 남자의 전화와 몇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치고 홀로된 그녀의 삶을 반추해 볼 때 그 둘은 이미 서로에게 물처럼 스며든 연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민병식]
시인,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현)대한시문학협회 경기지회장
현)신정문학회 수필 등단 심사위원
2019 강건문화뉴스 올해의 작가상
2020 코스미안상 인문칼럼 우수상
2021 남명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상
2022 신정문학상 수필 부문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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