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는 어떻게 생겼는가. 우주 속에 내가 존재하는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내 몸이 소멸되면 내 마음과 정신도 없어지는가. 육체와 영혼이 별개의 것으로 분리될 수 있겠는가. 이 같은 거창한 문제에 만인이 만족할 만한 해답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해답을 찾아볼 수밖에 없으리라.
밖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무궁무진 무한한 이 우주의 영원한 수수께끼를 풀어보기 위해 태어난 신비스러운 우리 자신들이 아닌가. 이토록 신비로운 삶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해답을 찾는 일이 언감생심이라면 신곡(神曲)이 아닌 인곡(人曲)부터 지어 부른, 201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포크 스타 밥 딜런(Bob Dylan 1941 - )의 1970년대 대표적인 반전시위노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Blowing in the Wind,’ 아니 그보다도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정감 넘치는 ‘아리랑’ 가락이 그 바람개비 풍향계가 될 수 있으리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란 노래를 들으면 한국에 살고 있든 해외에 살고 있든 우리 모두가 다 가슴이 찡해지지 않는가. 이는 비단 한국인의 경우일 뿐 아니라 인류가 다 그러하리라.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1위에 선정되지 않았는가. 2011년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전 세계 유명작곡가들로 이루어진 세계 아름다운 곡 선정하기 대회에서 지지율 82%라는 엄청난 지지를 받고 아리랑이 선정됐는데 선정 과정 중에서 단 한 명의 한국인도 없었고 이들은 놀라는 눈치였다는 보도였다.
“아리랑의 시원과 비밀을 풀자면 지상이 아니라 천상의 세계까지 찾아봐야 할지 모른다. 아리랑은 인간만의 노래가 아닐 수 있다. 인간 태초의 소리가 담겨 있다는 아리랑은 어쩌면 외계인과도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나는 아리랑이 남과 북은 물론이고 지구인과 외계인과의 소통까지 가능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 처음 내뱉는 옹알이가 ‘아리, 아리랑’이 되었듯이 아리랑이 우주에서 통할 원초적 언어라면 아리랑을 매개로 우주 저 반대편과 통하는 날이 오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2015년 12월 22일자 중앙일보 일간스포츠 ‘갓모닝’ 칼럼 ‘을미년, 우리 의식을 깨우게 한 아리랑’에서 차길진(1947-2019) 후암미래연구소 대표가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아리랑은 우리 민족이 인생의 한을 흥겹게, 때로는 구슬프게 승화시켜왔다면 옛날얘기는 그만두고 지난 한 세기만 돌아보더라도 너무도 한 많은 세월이 아니었나. 뉴욕타임스는 2015년 12월 19일 자에서 한국에서 그 당시 논란을 빚고 있던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내용을 대서특필했었다. 이 보도를 계기로 뉴욕한인학부모협회는 박 교수의 해임을 대학 당국에 촉구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주한미군을 따라다니는 ‘담요부대’로 불린 한국인 매춘부들에 비교하는가 하면 가난에 의한 자발적 지원이고 일본군과 동지 같은 관계를 형성했었다는 등의 책 내용이 큰 파문을 일으켰었다. 우리 조상들이 지금처럼 당쟁만 일삼다가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젊은 남자들은 징병으로, 나이 좀 든 남자들은 징용으로 끌려나가 개죽음을 당하거나 혹사당하다 병사하지 않았는가. 동시에 생과부가 된 여인들은 어떻게든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가야 했고, 어린 아가씨들은 강제였든 아니었든 생존수단으로 성 노예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2차 대전 종전으로 해방을 맞았으나 남북으로 갈려 동족상잔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총부리를 서로 겨누고 있지 않은가. 또 월남전에는 일종의 용병으로 참전해 무고한 생명들을 살상하고 자신들의 목숨도 바치지 않았는가.
앞에 언급한 ‘담요부대’로 돌아가 얘기 좀 해보리라.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전혀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1961년 2월 입대해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받던 1960년대만 해도 그랬다. 저녁이면 부대 주위로 ‘담요부대’가 진을 쳤었다. 오늘날에는 생경하게 들릴 ‘보릿고개’란 말이 예사로웠었다. 햇보리가 날 때까지 넘기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덜 여물어 식량이 부족하여 지내기가 어려운 상태, 또는 그 시기를 맥령(麥嶺), 춘궁기(春窮期), 춘황(春荒)이라 하여, 굶주린 시골 아낙네들이 군의 야전 식량으로 보급되는 건빵 한 봉지씩 얻기 위해 몸을 팔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동전도 은전도 금전도 아닌 ‘엽전’ 가난뱅이 한국 군인을 상대하는 이런 ‘똥갈보’에 비하면 일본 군인이나 미군을 상대하는 ‘일본공주’나 ‘양공주’들은 양반 신세였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과 동지 같은 관계를 형성했었다면 이 또한 말이 좀 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군인 신분이든 민간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전쟁의 제물로 동원된 ‘희생양’의 입장에서 볼 때, 제 목숨 바쳐 가며 남의 생명 앗아가는 일보다는 제 몸 바쳐 사지에 몰린 절망적인 젊은이들을 잠시나마 위로해줄 수 있는 일이었었다면 이는 숭고하고 자비로운 일이었다고 칭송할 만하지 않을까. 1960년대 말부터 서울에 ‘미아리 텍사스촌’이란 곳이 있었다. 미아리 텍사스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88번지 일대의 성매매 밀집 지역을 이르는 속칭으로 1960년대 말 당시 서울의 대표적 집창촌이던 양동과 종로3가(속칭 ‘종삼’) 지역의 폐쇄로 성 판매 여성들이 하월곡동 정릉 천변으로 유입되면서 형성되었었다.
‘유곽의 역사’라는 책에 따르면 1층에서는 술을 마시고 2층에서는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18세기 미국 서부영화 속에서 묘사된 술집에서 착안하여, 기존의 사창가와 자신들을 구분 짓기 위해 스스로를 텍사스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군인이나 깡패, 조직 폭력배 또는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 한때 활개 쳤던 ‘고문기술자’들에 비한다면 이 집창촌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자신의 청춘을 바쳐 가족을 부양하고 동생들 학비까지 조달한 ‘미아리 아가씨들’은 천사들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온 우리 구세대와는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오늘의 젊은이들은 ‘미아리 아리랑’을 불러야 하리라. 아니 ‘미사고 아리랑’을 불러야 하리라.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아리랑’ 말이어라. 과거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민족은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병자호란,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5 전쟁도 잊은 채 저마다 밥그릇 싸움에만 이전투구라니 아, 슬프도다! 돈으로 선진국 된들 정신이 썩으면 얼마나 버틸까. 법 이전에 정직하게 도덕과 양심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되려면 잘못을 알면서도 외면하지 말고 투표 때 확실하게 본때를 보여주는 국민이 돼야 하리라.
자, 이제, 시야를 한반도, 동서양을 넘어온 지구촌으로 돌려 보리라. 우리는 모두 오디세우스의 후손이고 단테의 후예가 아닌가. 8살 된 베아트리체를 우연히 보게 된 9살의 단테는 평생 베아트리체를 기억하고 사랑하기 시작한다. 귀여운 아이 베아트리체는 아름다운 여인이 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다음 불과 24살의 젊은 나이에 죽는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베아트리체이지만 그녀를 잊을 수 없었던 단테는 그녀를 위해 ‘신곡(神曲)’을 쓴다. ‘신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는 더이상 아름다운 인간이 아닌 사랑-자비-성령 그 자체다. 8실짜리 아이가 신(神)이 된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애창되는 미국 포크송 ‘메기의 추억’이 있다. 원제목인 ‘메기, 그대와 내가 청춘이었을 때(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란 시는 이렇게 끝맺는다.
사람들은 내가 나이 들었다고 말하지요
내 걸음걸이는 예전에 비해 느려졌다오
시간이란 세월이 그렇게 만들어버렸죠
얼굴에는 내가 살아온 세월만큼의 사연이 적혀 있다오
(중략)
우리가 같이한 시간들
함께 부른 노래들은 이미 흘러간 시대의
낡은 것들이라 사람들은 말하지만
메기, 당신은 우리가 젊었을 때 그 시절 그 모습으로
여전히 아름답게 내 가슴 속에 살아있다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시는 체험이라고 했다. 토론토대학에 재직하던 조지 존슨은 학생이던 메기 클락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단풍잎’이라는 자신의 시집에 폐결핵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위한 사랑의 시를 바친다. 이 시에 친구인 제임스 버터필드가 1864년 곡을 붙였으나 메기는 23세의 나이로 떠나 이 사랑의 노래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메기야 희미한 옛 생각
동산 수풀은 없어지고
장미화는 피어 만발하였다.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고향을 떠난 나그네들이다. 모든 인간의 고향은 바다였고, 바다의 기원은 지구란 행성을 만들어 낸 우주의 티끌이며, 이 티끌은 빅뱅에서 시작되었다면, 우리말로 해서 하늘과 땅이 교합해서 생긴 우주 만물의 영원한 고향은 하늘의 정기를 받은 ‘코스모스바다’이리라. 이 코스모스 바다로 날아가는 우리 모든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의 노래가 바로 우리의 인곡(人曲)인 ‘아리랑’이리.
요즘 세계언론은 지난 IMF 사태 때와 같이 대한민국의 코로나바이러스 대응 방식을 교과서적인 모범사례로 극찬하고 있다. 이번에도 이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재앙을 어서 극복하여, 전화위복으로 돌리고, 한반도에서 새로운 코스미안 시대가 열리는 선명한 꿈을 꾸어본다. DMZ에 세계평화공원이 조성되고 평창에 코스미안대학이 설립되어 전 세계인들이 한반도로 성지순례 오는 날이 도래하고 있는 꿈을 꾸어보는 것이다.
2011년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전 세계 유명작곡들로 구성된 세계 아름다운 곡 선정하기 대회에서 지지율 82%라는 엄청난 지지를 받고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1위에 선정될 때 유명 전자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이 연주했다는데 그 당시 우리 국악밴드와 판소리까지 어울렸더라면 그 얼마나 더 좋았으랴. 그랬더라면 지지율이 100% 만점이었으리라. 우리 한반도의 지정학상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아오다 보니 우리 뼛속까지 사대주의 사상에 찌들어 종교, 문화, 정치, 경제 등을 막론하고 무조건 외국 특히 서양의 물질문명을 숭배하고 숭상하는 풍토에서 우리 고유의 보배로운 자산을 찾아 발굴하는 쾌거에 쾌재를 부르게 된다. 지난 2015년 6월 18일 자 한국일보 연예스포츠지 기사로 보도된 창작 뮤지컬 ‘아리랑’ 이야기다.
조정래의 동명 대하소설을 각색한 이 작품은 아이돌과 로맨스로 수렴되는 국내 뮤지컬 시장에서 민족 치욕을 기록한 작품에 이처럼 무모한 투자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면서 ‘아리랑’의 제작자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와 고선웅 연출가를 이은주 기자가 인터뷰한 것이었다. 박 대표는 “뮤지컬 ‘아이다’의 핍박받는 누비아 백성들이 조국을 그리며 노래하는 장면에서, 우리 민족의 아리아인 아리랑이 생각났다. 지금 뮤지컬계가 젊은 관객 취향에 맞춰서 전부 로맨틱 코미디를 만든다. 관객이 뭘 듣고 싶은지도 중요하지만 예술가에게는 이 시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느냐가 중요하다. 객기가 없으면 새로운 작품은 못 만든다”고 실토한다.
한편 박 대표의 러브콜을 한 번에 수락했다는 고선웅 연출가는 “청산의 옥도 돌멩이로 보면 돌이다. 아리랑을 어떻게 뒤집어 보느냐에 따라 한국 뮤지컬의 새 지평(地平)을 열 수 있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보고 이건 아리랑이 아니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부담이 있다. 동시에 다른 작품이어야 한다. 초고 쓰는 데 1년 가까이 들었다. 복합구조 이야기를 추려 감골댁 이야기로 묶었다. 애이불비(哀以不悲), ‘슬프지만 슬프지 않다’로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강요된 슬픔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고 싶다. 전환 장면마다 우리 안에 유전인자처럼 박힌 아리랑이 울려 퍼지게 할 거다”라고 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가 말했던가. “독자마다 독자가 읽는 건 독자 자신일 뿐이다”라고. 그리고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1207-1273)도 우리에게 상기시키지 않았던가. “그대는 대양의 물 한 방울이 아니라; 그대가 물 한 방울 속에 있는 대양의 전부이다”라고. 진실로 내 안에 없는 것을 밖에서도 찾을 수 없으리라. 그러니 뭣보다 먼저 참된 자아발견이 있어야 하리라. 아, 그래서 미국의 흑인 인권투사 맬컴 엑스(1925-65)도 이렇게 선언했으리라.
“나는 뭣보다 앞서 인간이고, 그런 인간으로서 온 인류를 이롭게 하는 누구든 뭣이든 다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아, 진정, 이것이 바로 우리 단군의 홍익인간이고 천도교의 인내천이며 우리 모두 하나같이 우주인으로서의 코스미안 사상이 아니랴! 진정코 그럴진대 아름다운 우리 아리랑 가락 ‘복음’을 세계 방방곡곡에 전파해야 하리라. ‘타타타’ 산스크리트어로, ‘그래, 바로 그거야.’ 독선 독단적이고 편파적인 ‘신’의 이름으로 살육지변이 끊이지 않고,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지구생태계를 파괴하며, 금전만능의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고 있는 인류와 자연만물을 구원하기 위해서 말이다. ‘타타타’ 바로 그거지. 아리랑 가락에 띄워 온 누리에 전파하는 거야. 온 인류를 이롭게 하는 우리 초심, 우리 코스미안의 본심의 참된 복음을.
교향곡 ‘한국인’을 작곡한 폴란드의 대표적 작곡가 크시스토프 펜데레츠키(1933-2020)가 2020년 3월 29일(현지시간) 향년 86세로 타계했다. 악보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Korean’이라 불린 그의 ‘교향곡 5번’은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해방 50주년을 기해 국제 한국문화 협회의 위촉을 받아 작곡된 것으로 1992년 작곡가의 지휘로 The Korean Radio Symphony Orchestra가 초연했다.
이 곡은 1991년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이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를 위한 애가(1960)’를 듣고 이 세계적 작곡가가 일본을 위한 곡만 쓰고 한국을 위한 곡은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일본 강점기 등 오랜 역사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한국인의 진혼곡을 써달라”는 요청을 해서 우리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모티브를 반복적으로 쓴 ‘한국 Korean’이 작곡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작곡가 펜데레츠키 자신이 이 ‘교향곡 5번’에 대해 한 말이다.
“그 누가 내 교향곡 작품들을 ‘쓸데없는 성전’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리라. 난 세상을 구하라는 유혹을 오래전에 뿌리쳤노라고. 나는 다만 인간적이고 예술적인 차원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보존하려고 애쓸 뿐이다”
나 또한 세계평화 같은 거창한 꿈을 오래전에 버렸지만 가까운 이웃 나라, 그것도 왕실을 비롯해서 백제인의 후손들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인과의 선린관계를 맺는데 일조가 될 수 없을까 해서 ‘한일 아리랑 별곡’ 하나 불러보리라.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천추 아니 만추의 한이 된 이야기다. 1970년 직장업무로 일본에 출장 갔다가 일을 다 보고 하루 이틀 틈이 나서 당시 열리고 있던 오사카 엑스포를 관람한 후 유서 깊은 교토와 나라로 향했다.
신간센 급행열차를 타고 역에 내려 역 앞 광장에서 두리번거리다 마침 내 옆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는 아가씨에게 내 서툰 일본어로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잠깐만 기다리라며 자기가 기다리던 언니 되는 사람과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언니를 보내고 나서 아가씨가 자청해서 일일 관광 안내를 해주겠단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했던가. 뜻밖에 아리따운 아가씨의 이런 호의를 어찌 사양하고 거절할 수 있으랴.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황홀하도록 달콤한 하루가 순식간에 저물 무렵 금상첨화라 할까, 자기 집으로 저녁 초대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언제 친구들을 불러 모았는지 혼자 사는 자기 집에서 다 함께 깔깔대며 화기애애하게 저녁 식사 후 밤늦게 기차역 플랫폼까지 전송을 받고 우리는 헤어졌다. 밤 기차로 동경에 도착, 다음 날 아침 하네다 공항에서 나는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할 때까지 나는 일본 아가씨가 헤어지면서 내게 건네준 종이쪽지를 손에 꼭 쥔 채 무진히 고민했다. 아가씨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이 쪽지를 어쩔 것인가? 꿈꾸듯 아가씨와 하루를 같이 지내면서도 나는 처자식이 있는 기혼자라는 사실을 아가씨에게 밝히지 못했다. 아가씨가 물어보지도 않는데 말하기도 그렇고, 또 한편으로는 잠재 의식적으로 내가 미혼자 싱글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미치도록 안타깝고 후회막심의 유감천만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지 않아도 2년 전 서울에서 나는 신문기자직을 버리고 ‘해심(海心)’이라는 이색주점 대폿집을 차려 친구 손님, 손님 친구들과 취생몽생하다가 어는 날 밤 만취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데이트도 한 번 안 해본 아가씨와 하룻밤을 지낸 뒤 ‘도의적인 책임’을 진답시고 그 아가씨와 천신만고 끝에 결혼했으나 서로 맞지 않아 가정이 불화하면서도 애들 때문에 마지못해 살고 있는 형편과 처지였었다.
그러니 내가 어쩔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과민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 아가씨는 그냥 단지 내게 친절을 베풀어줬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 아니면 영 아니다. Now or Never’이고 ‘전유 아니면 전무’이지 다른 선택이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나는 일본 아가씨가 준 종이쪽지를 찢어버리고 말았다.
나를 한시바삐 잊게 해주는, 아가씨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합리화시켜 나 자신을 달래면서. 지나고 돌이켜 보니 일본 아가씨를 위해서는 최선이었을는지 몰라도 나 자신을 위해서는 최악의 결단이었는지 알 수 없어라. 그런 후 결혼한 지 3년도 못 돼 우리 부부는 성격의 상충은 물론 가치관의 상치로 합의이혼을 하고 보니 아내가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할 수 없이 애들을 위해서라도 더 노력해보겠다고 18년을 더 정말 초인적으로 기를 쓰고 애를 써본 끝에 두 번째로 이혼, 처음 결혼한 지 20여 년 만에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영웅전 위인전 등을 탐독하고 ‘마음의 샘터’ 같은 책에 나오는 세계명언들을 딸딸 외우면서 나 자신을 당위성, 독일어론 ‘sollen,’ 영어로는 ‘ought to be’에 끼워 맞추려고 엄청나게 억지를 많이 써온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to be or not to be’라고 독백했다지만 인생 80여 년 살아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내가 왜 진작 ‘실존적’으로 살지 못했을까 한스러울 뿐이다. 영어로는 ‘to be,’ 독일어론 ‘sein,’ 그래, 그렇지, ‘not to be’하지 말고 생긴 대로, 가슴 뛰는 대로 살아봤어야 할 일이었다. 하룻밤 아니 한순간 같이 지낸다 해도 찰나이면 찰나인 대로 만리장성을 쌓아 볼 일이었으리라. 얼마 전 친구로부터 전달된 이메일 하나 나눠보리라.
어느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신혼생활 한 달여 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징용이 되면 그 성 쌓는 일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죠. 안부 정도는 인편을 통해서 알 수야 있겠지만, 부역장에 한 번 들어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신혼부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 터이라 혼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부역장에 보낸 여인이 외롭게 살고 있는 외딴집에 어느 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 들었었죠. 남편의 나이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한 사람이 싸리문을 들어서며 “갈 길은 먼데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 밖에 없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주십시오”하고 정중하게 간청을 했죠. 여인네가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주변에는 산세가 험하고 인가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사내가 말을 걸었죠. “보아하니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있는 듯한데 사연이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그동안의 사정을 말해주었죠. 밤이 깊어가자 사내는 노골적인 수작을 걸었고,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여인과 실랑이가 거듭되자 더욱 안달이 났었죠.
“이렇게 살다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서 정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직 우리는 너무 젊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의 평생을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사내는 별별 수단으로 여인을 꼬드기기 시작했었죠. 하지만 여인은 냉랭했습니다. 사내는 그럴수록 열이 나서 저돌적으로 달려들었고, 여인의 판단은 깊은 야밤에 인적이 없는 이 외딴집에서 자기 혼자서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여인은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겠다고 말한 뒤, 한 가지 부탁을 들어 달라고 조건을 걸었었죠.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남편에게는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그냥 당신을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드릴 테니 날이 밝는 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서 갈아입을 수 있도록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글 한 장만 받아주십시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주는 기분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나면 당신을 따라나선다고 해도 마음이 좀 홀가분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저는 평생을 당신을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그 약속을 먼저 해주신다면 제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음씨 또한 가상한지라 좋은 여인을 얻게 되었노라 쾌재 부르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욕정을 채운 후 곯아떨어졌죠. 사내는 아침이 되어 흔드는 기척에 단잠을 깨었죠. 밝은 아침에 보니 젊고 절세의 미모에다 고운 얼굴에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니 양귀비와 같이 천하 미색이었죠.
사내는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서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나서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채비를 했고, 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의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괴나리봇짐에 챙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내 마음은 이제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해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었었죠.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하여 감독관에게 면회를 신청하면서 옷을 갈아입히고 글 한 장을 받아 가야 한다는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감독관이 말했다.
“옷을 갈아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작업장을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입을 동안 당신이 잠시 교대를 해 줘야 가능하다”
사내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고 여인의 남편을 만난 사내는 관리가 시킨 대로 대신 들어가고 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었죠. 남편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편지가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아내 해옥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룻밤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입는 즉시 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허물을 탓하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 안으로 돌아가십시오.”
자신을 부역장에서 빼내 주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고백을 듣지만 그것을 용서하고 아내와 오순도순 사는 것이 낫지, 어느 바보가 평생 못 나올지도 모르는 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가서 교대를 해주겠는가? 남편은 옷을 갈아입고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랍니다. 이거야말로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을 다 쌓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많은 인간사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만리장성을 쌓아준다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어리석은 그 사내처럼 잠시의 영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만리장성을 영원히 쌓아주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요!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