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중의 춤은 승무다. 승무는 불교의 정통 춤은 아니다. 흰 장삼을 입은 어깨에 붉은 가사를 두르고 머리에는 흰 고깔을 쓰고 추는 민속춤이다. 춤사위가 다양하고 춤의 기법도 독특한 우리 조상들이 즐겨 추었던 춤이다. 6박자인 염불을 이용한 불교적인 춤이지만 불교의 오리지널은 아니다. 우리 민속 악기인 장구, 피리, 저, 해금, 북으로 염불처럼 빠르게 혹은 느리게 반주하며 허튼타령, 빠른타령, 느린굿거리, 빠른굿거리로 전체적인 장단의 흐름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승무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조지훈의 시 ‘승무’를 읽은 사람이라면 승무의 춤사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승무를 읽고 나면 우리 유전자에 들어있는 흥이 저절로 발현되어 손끝부터 발끝까지 생명의 움직임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흥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코드다. 천지의 기운을 만나 일으키는 즐거운 감정이 흥인데 ‘흥’은 ‘한’과 대조되는 기운이다. 우리는 한이 많은 민족이라고 알고 있지만 한보다 흥이 많은 민족이다. 그 ‘흥’이야말로 우리가 이 지구에서 살아남은 원동력이며 생명력이다. 현대에 와서 그 흥이 K-문화로 승화되어 노래로, 춤으로, 영화로, 패션으로, 음식으로, 자동차로, 방산으로 세계 곳곳에서 사랑받고 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고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으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뚜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나는 산에 있는 절을 좋아해 자주 간다. 승무를 볼 수 있는 건 극히 드물다. 승무는 두어 번 본 것이 전부다. 춤은 몸의 언어다. 몸으로 풀어내는 정신적 몸짓이다. 승무가 그렇다. 겸허하다 못해 고요하고 고요하다 못해 신비로운 것이 승무다. 몸짓을 통해 내 안의 나를 만나는 경건함이다. 우리 내면에 있는 번뇌와 고통과 희망까지도 모두 털어내는 춤이 승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왜냐면 하얀 고깔에 감춘 얼굴은 도통 그 표정을 알 수 없다. 슬픈 것인지 즐거운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생각을 잊은 것인지 알 수 없기에 종교라는 이름을 씌워 신비로움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을 했다.
조지훈 시인도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고 했지만 정작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햐이얀 고깔에 숨어 보이지 않고 두 볼에 흐르는 빛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와서 서럽다는 말은 맞는 듯했다. 그렇다. 고와서 서러운 감정을 나는 몸의 언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몸을 통해 밖으로 나와 춤으로 승화된 것 그것이 승무다. 불교를 모르더라도 구도를 모르더라도 또는 깨달음을 모르더라도 몸이 풀어내는 언어에는 마음의 몸부림이 숨어 있다. 그 몸부림을 조지훈 시인은 ‘나빌레라’고 표현했다.
‘나비 일려나’와 ‘나비 일리라’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나빌레라’는 조지훈 시인의 창조적 언어다. 시를 짓기 위해 한땀 한땀 수를 놓듯 삼 년이라는 시간을 공들여 만들어 낸 시가 승무다.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한 조지훈은 주로 자연이나 무속, 그리고 선을 중심으로 불교 세계관에 관한 작품을 많이 섰다. 경상북도 영양의 깊은 산골에서 1920년에 태어나 독학으로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어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나와 ‘문장’지에 승무를 추천받아 시인이 되었고 1968년 사망했다. 승무를 읽다 보면 K-문화의 아이돌 춤이 자꾸 떠오르는 건 종교와 문화는 결국 같은 선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이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비 같은 춤사위는 결국 우리 민족의 ‘나빌레라’가 아닐까.
얇은 사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