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이든 너무 흔하면 값어치가 떨어진다. 금이 비싸게 팔리고 고려청자에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그것이 귀하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가 모래처럼 지천이라면 누가 거들떠보기나 할까.
무릇 세상사의 이치가 다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넘치면 천박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사랑도 바로 그렇지 않은가 한다. 한번 찾아보라, 요즘 대중가요 가사에 ‘사랑’ 들어가지 않은 것 어디 있던가. 지었다 하면 사랑 노래요, 불렀다 하면 사랑 타령이다. ‘사랑’ 아니고는 노래가 아예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랑은 천지에 널렸다.
비단 노래에서 뿐이 아니다. 눈에 뜨이는 게 사랑이며 발에 차이는 게 사랑이다. ‘사랑의 집’이니 ‘사랑산부인과’니 ‘아이사랑사진관’이니 ‘교통사랑봉사대’니……, 심지어 ‘시사랑’이며 ‘수필사랑’까지 있고 보면 더 말해 무엇 하랴.
한때 114에 전화번호를 문의하면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멘트가 흘러나왔었다. 누군가 그 인사말을 듣고서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고 연애를 걸어 왔다는 거짓말 같은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참으로 웃지 못할 일화가 아닌가.
이처럼 넘쳐나는 것이 사랑이건만, 정작 세상엔 사랑이 메말라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오늘도 목마르게 사랑을 찾아 헤맨다. 이 아이러니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말 따로 마음 따로다. 말이 앞서면 진실성이 없어진다. 그래서 그 허식을 감추려고 다시 말을 앞세운다. 이것은 악순환을 부른다. 아마도 그 때문이지 싶다. 서양 사람들은 달아나려는 사랑을 붙들어 두려고 입에다 노상 ‘아이 러브 유’를 달고 사는가 보다. 그들은 하루에 열 번도, 스무 번도 더 “사랑해요”를 속삭인다. 그렇게 밥 먹듯이 사랑을 하면서도, 왜 갈라서기는 식은 죽 먹듯이 하는 것인가.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박남수의 시 「새」 중에서>
시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단순히 새의 순수한 사랑을 예찬하자고 한 노래는 분명 아닐 게다. 바꾸어 읊으면, ‘사람은 울어 뜻을 만들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한다’쯤 되지 싶다. 결국 시인은 인간의 가식적인 사랑에 대한 풍자를 이렇게 우의적으로 노래한 것이리라.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일평생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잘 사랑하며 슬기롭게 가정을 건사해 오셨다.
꼭 말로 해야만 사랑이 되는 것일까. 말로 하는 사랑보다 눈빛으로 하는 사랑이, 눈빛으로 하는 사랑보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말보다는 눈빛이, 눈빛보다는 가슴이 더 따뜻하고 아름답고 진실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잃어버린 사랑이, 그 참사랑이 못내 그리워진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